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되돌아보는 점토 시절의 나
점토류였던 나는 따스한 부모님에게 잘 반죽되었다. 반죽은 여기저기 패대기쳐지기도 했지만 어찌저찌 숙성되었다. 마침내 취업 채용이라는 불가마에 뛰어들어 구워지고 나니, 나는 꽤 단단한 초벌구이가 되었다. 단단해진 나는 더 이상 무르지 않았다. 그만큼 다시는 반죽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유연하게 몸을 찢으려 하다가는 와장창 깨져버리는 그런 초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초벌은 이따금씩 점토를 꿈꾼다. 따스한 부모님의 손에서 걱정 없이 저녁메뉴 맞추기 놀이를 하던, 그런 점토를 꿈꾼다. 사소한 것 하나에 울고 웃던, 되돌아갈 수 없는 그 때 그 시절의 나를 추억한다. 그럼에도 나를 맞이하고 있는 건 아마도 또 다른 불가마. 그 곳에서 구워지고 나면 나는 지금보다 더 단단한 재벌구이가 될 것이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는 점토같은 아이다. 그 무엇보다 순수하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정성껏 반죽되지 못하는 그런 점토다. 하지만 무니는 반죽되지 못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 앞의 디저트가 딸기냐 라즈베리냐에 따라 일희일비한다. 그러고는 포크가 사탕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딸기랑 라즈베리 다음에 포크까지 먹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무니는 디저트를 다 먹어치운 후 말한다.
"이런 게 인생이지"
무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슬픈 것에 울고 기쁜 것에 웃는다.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한, 더없이 선명한 인생을 산다. 영화의 알록달록한 파스텔 톤 색감과 무니가 바라보던 무지개의 채도는 그 자체로 무니를 상징한다. 라즈베리 아이스크림 하나에 완전한 라즈베리 색이 될 수 있는 그런 인생. 나는 무니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무니처럼 살 수 없음을 알았다.
내 삶은 무니의 인생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둥글고 싶지만 네모났고 블러가 낀 듯 흐릿했다. 어느샌가부터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고, 싫은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했다. 후회할 일들을 해왔다. 그 뒤에는 늘 설득력 있는 합리화가 뒤따랐다. 성격에 대한 얘기, 사회에 대한 얘기, 명분에 대한 얘기들은 그렇게 흐릿한 삶을 보정해왔다.
나는 점토인 무니와 달리 초벌이었다. 초벌에게 주어진 삶은 점토의 말랑함을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가혹했다. 무니의 디저트 자리에는 영양제가 들어섰고, 비밀기지에는 월세가 들어섰다. 무니가 바라보던 무지개의 자리에는 나를 체온으로 반죽해주었던 이들의 주름진 손이 들어섰다. 나는 사탕포크를 먹어버리겠다는 상상을 하기에는 이미 쇠포크처럼 단단했다. 초벌은 점토가 될 수 없었다. 사랑으로 빚어 만들어진 책임은 너무 단단해서 결코 깨어질 수 없었다. 이 강직함을 깨고 점토가 된다는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나를 올바로 반죽하기 위해 애써왔던 수많은 이들의 노력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는 행동이었다.
처음에는 더 이상 무니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씁쓸했다. 점토 시절의 순수했던 모습은 이제 되찾을 수 없는 걸까, 세상에 너무 물들어버려 돌이킬 수 없게 돼버린 걸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들이 쓸모 없음을 안다. 점토는 후회와 갈망의 대상이 아니다.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추억이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가 한 때 점토였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렸을 적의 짧은 기간동안 알차게 무니의 인생을 살았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점토는 오브제가 되어 지금의 내 삶에 결핍되어있는 의미를 새롭게 부여해준다. 나는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나 자신을 언제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내 그릇이 단단해지고 성숙해질수록 삶의 무게는 버거워진다. 각박한 사회의 요구들과 어려운 인간관계. 평생을 일해도 몸 누일 방 한칸 구하리라 장담할 수 없는 세상. 어깨에 짊어져지는 책임들. 하루가 멀다하고 시끄러운 뉴스란의 사건사고. 꼴불견 정치인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단단함을 강요한다. 이정도는 견뎌내고 얼른 재벌구이가 되야 한다고, 뜨거운 불가마를 더욱 부채질한다. 그런 삶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방문을 걸어잠그고 침대에만 침잠하게 된다. 자존감은 낮아져가고, 스스로를 부여잡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생겨난다. 그럴 때마다, 점토 시절의 추억은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준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웠던 점토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세상을 휘젓고 다니던 녀석이다. 지구가 둥근지도 모르면서 내가 보는 세상이 곧 만물이라 여겼을 녀석이다. 이 당돌한 점토를 떠올리다보면 어느새 자기혐오는 사라져있다. 그 빈 자리는 사랑스러운 점토류가 차지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사랑과 똑같이, 지금은 초벌인 나를 점토 때 처럼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가족들이 들어선다.
모난 생각은 그렇게 둥그래진다. 소중한 것들을 떠올리게 되고,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 말하게 된다. 다소 흐릿한 내 삶이 사랑스러워진다. 이런 생각들과 함께 나는 오늘도, 한층 더 성숙하게 구워진다. 다소 버거운 인생이지만 오늘도, 한걸음 더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