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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Dec 14. 2024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사는 법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国境の長い トンネル 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


설국을 처음 읽었을 때가 기억납니다. 당시는 뜨거운 여름의 도서관에서 이 책과 칼 융의 레드북을 대여했습니다. 레드북을 먼저 읽었는데 그 책을 읽느라 많은 날을 써버려 설국은 허겁지겁 바쁘게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첫 문장은 뇌리에 박혀 빠져나오지 않았습니다. 뜨거움 여름이었지만 코끝을 시리게 만드는 눈 섞인 바람이 책에서부터 불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단 세 마디로 왜 설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책인지 증명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겨울이 사라진 지구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겨울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면 위 문장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계절의 모습을, 한 장면의 모습을 이렇게 아름답게 포착할 수 있는 그 능력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며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도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고통스럽다. 


우리는 몸의 피로함, 너무 많은 일, 스트레스, 그리고 단순히 무자각으로 매 순간 아름다운 우리의 모습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 문장은 단순히 주인공이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 눈이 소복이 쌓인 곳의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선 장면입니다. 딱히 아름다운 순간이 아님에도 그 장면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순간이 저토록 아름다워질 수도, 아니면 기억의 저편으로 천천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소설의 아름다운 문장은 등장인물의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상황을 묘사해주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상도 누군가에게 소설처럼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스쳐 지나가는 찰나가 저 아름다운 문장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름다운 문장과 적절한 어휘는 마치 필터처럼 우리의 장면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사실을 감추는 것이 아닌 더욱 선명하고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이 필터와 아름다운 문장의 차이입니다. 필터는 장면을 사실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아름답게 만들지만, 문장을 오히려 그 장면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어 우리가 놓친, 고통받던 장면이 사실은 아름다웠음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일기에 내가 오늘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래서 내 기분이 어땠는지, 일기장에 털어놓기 바쁩니다. 물론 그것이 일기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오늘 기억의 남는 한 장면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떤가요? 내가 놓치고 살았던 찰나에 아름다움이 머물게 될 겁니다.


나아가 바쁜 일상에서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존재하는 이 현장을 관찰하고 마음속으로 적절한 어휘를 조합해 문장으로 만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늘 내 주변에 있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내가 바쁠 때도, 고통받을 때도, 박장대소할 때도, 음모를 꾸밀 때도, 좌절할 때도 아름다움은 구석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겁니다. 소설 속 주인공만 아름다운 문학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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