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더 높고 더 진실한 형태만 응시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작품과 그 너머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더 높고 더 진실한 형태만 응시했다.
이 문장은 20세기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장입니다. 어느 날 슈테판은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이자 그의 영웅인 오귀스트 로댕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로댕은 자신의 작업물들을 보고 싶어 할 슈테판을 자신의 작업실에 데려가 방금 완성한 여인의 조각상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자신의 조각상을 바라보던 로댕은 무언가 석연찮음을 느끼고 간단한 수정에 들어갑니다. 간단히 수정을 마치고 다시 멀리서 바라보고, 이내 다시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다시 수정에 들어가고를 반복합니다. 로댕은 자신의 작업에 몰두해서 자신이 초대한 손님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한 시간 반을 작업에 몰두합니다.
한 시간 반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작업물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명받은 슈테판은 로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작품과 그 너머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더 높고 더 진실한 형태만 응시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 거의 눈물이 나올 뻔했습니다. 로댕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존재, 인간의 참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잊고 살아온 우리의 본질입니다. 나의 모습과 생각을 투영할 수 있는 하나의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 열정을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누구나 어렸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블록을 쌓아 올리고, 그림을 그리고, 피겨를 조립합니다. 만약 그것이 무너진다면 우리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느끼며 울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예전에 영상편집을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험 삼아 제가 여행 가서 찍은 영상들을 모아 편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충 연습 삼아 만들어야지"라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편집을 하던 중 창 밖을 보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12시간이 넘도록 편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편집만 하려고 했더니 "이렇게 하면 더 완벽할 텐데..." 하며 더 추가하고 유튜브나 구글에 새로운 편집 기술을 검색하고 배우면서 적용시키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돌려보면서, "이 부분에 이런 음악이 들어가면 딱 좋은데..." "이 부분에서는 이런 식의 자막이 들어가면 딱 좋은데..." "이 부분에 이런 효과만 넣으면 완벽한데..." 하며 계속 만지작 거렸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배워서 겨우 적용한 효과임에도 뭔가 마음에 안 들면 과감히 삭제하기도 했습니다. 이 영상이 내 자식 같았고 완벽했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적 행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창조할 때 더 높고 더 진실된 형태를 응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내 창조물에 대한 사랑입니다. 완벽에 대한 사랑입니다. 연인의 사랑은 고백으로 얻어내지만 창조의 사랑은 열정으로 얻어냅니다. 그렇기에 창조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이상 열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해내기에도 벅차도록 바쁘기 때문입니다. 점차 기계화되는 인간에게 창조해 내는 능력이 감춰졌습니다.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로댕처럼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짧은 시 한 편 정도는 만들 수 있습니다. 낙서 같은 그림도 그릴 수 있습니다. 어설픈 레시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짧은 영상 편집 정도도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도 어설프지만 뜨개질로 목도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나만의 썰렁한 개그도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습니다. 초라하지만 내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아름다운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작품과 그 너머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더 높고 더 진실한 형태만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