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에 자신이 없다면 양으로 승부하라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도 손에 집히는 대로 읽고 있습니다. 지금은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고 있습니다. 방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프랑스 원문 『이방인』의 따가운 시선이 불편해 프랑스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입니다. 이전부터 계속 읽고 싶었던 책이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서한집을 읽으면 아쿠타가와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질 수밖에 없죠. 그런 아쿠타가와상을, 25세의 젊은 작가가 대학교 도서관에서 30일 만에 쓴 책으로 받았다고 하니 — 다자이 오사무가 이 소식을 들었으면 무척 상심이 컸을 것 같습니다 — 무척 읽어 보고 싶었습니다.
짧은 감상평을 하자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야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아,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정도입니다. 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러셀의 서양철학사』가 보통 두꺼운 책이 아니다 보니 — 1100페이지 정도 됩니다 — 언제 재독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작가나 사상가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뭇잎 한 장으로 자신의 숲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잖아”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중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참 멋진 문장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사실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문장입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글 전체의 플롯이나 흐름이 아닙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아주 얇은 편린뿐입니다. 아주 앏지만 정말 눈부신 빛을 반사하는 유리 조각입니다.
작가는 그 유리 조각에 찰나 동안 비친 빛에 몸이 이끌려 책상 앞에 앉습니다. 그리고 흐릿해진 그 빛의 기억을 더듬더듬 거리며 글로 옮겨 적습니다. 오직 그 유리 조각에 비친 한두 문장을 적기 위해 수천 자의 글을 적습니다.
『설국』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 문장을 적기 위해 한 권의 소설을 완성시켰을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알베르 카뮈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이 한 문장을 위해 한 권의 소설을 완성시켰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그의 대표곡 <Merry Christmas Mr. Lawrence>의 멜로디를 떠올리는 데 3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아노 앞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더니 이미 화음을 갖춘 곡이 오선지 위에 그려져 있었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날아온 나뭇잎 한 장을 날렵하게 낚아채고, 날아가지 않도록 강하게 움켜쥐었던 것입니다.
제가 발행한 에세이 중 몇 편은 계획하에 쓰인 글이지만, 이 글을 포함한 여러 글은 나뭇잎 하나에서 시작한 글입니다. 사실 이 글은 아까 전에 “아, 맞다. 오늘 글을 써야지. 내일 발행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 부리나케 쓰기 시작했고, 무엇을 써야 할까 갈피를 못 잡다가 “눈부신 빛을 반사하는 유리 조각”이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라 주제를 잡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기 이 문장까지 쓰는 데 20분 정도 걸렸습니다. 마우스 휠을 드륵드륵 굴려 올려보니 이 정도 분량에 20분이면 거의 신기록입니다. 이 정도 분량이면 보통 한 시간은 물론 어떤 때에는 두 시간, 최종 편집까지 합치면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합니다.
어쩌면 지금 무척 피곤한 상태라 잠결에 쓴 이 엉망진창의 글이 썩 괜찮아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건 내일이 되어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글을 쓸 수 있게 만들어주는 — 글쓰기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같은 모든 창조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로 — 원동력은 ‘나뭇잎 한 장’이라는 이 문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나뭇잎을 자신의 숲으로 만드는 능력일 겁니다. 그 능력이야말로 노련한 작가이냐, 그러지 못한 작가이냐를 판가름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는가는 알지 못합니다. 그걸 알았더라면 저도 능숙한 작가가 되었을 테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게 날아온 나뭇잎에서 나뭇가지 하나 겨우 만들어 내는 정도, 혹은 그것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죠. 그 사실이 애석하긴 합니다만, 역시 계속해서 글을 쓰는 수밖에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재능에 자신이 없다면 양으로 승부하라.”
나카타니 아키히로의 문장을 떠올리며, 양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읽은 지 며칠 안 된
“작가나 사상가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뭇잎 한 장으로 자신의 숲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잖아.”
는 제 문장 수집 노트에 적혀 있습니다. 가장 최신 수집 문장 중 하나이죠. 그런데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재능에 자신이 없다면 양으로 승부하라.”
는 제 문장 수집 노트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 문장을 수집합니다. 이 글은 제가 수집한 문장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문장을 수집하는 과정이었나 봅니다. 소제목을 보시면 알겠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저 친구입니다. 제 글의 주인공은 늘 제목이 아닌, 소제목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