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판타 레이(Panta Rhei) 속 로고스를 찾아 보여준다.
최근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를 관람하고 왔습니다. 인상주의에 대해 더욱 깊게 알게 되고,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문제는 허리였습니다.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허리 통증이 당시까지도 남아 있어서, 앉을 곳이 눈에 보일 때마다 방앗간 지나가는 참새처럼 홀린 듯 날아갔습니다. 그렇게 앉아서 전시관을 둘러보는 데 벽에 적힌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눈에 닿는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사라지지 않는가? 자연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우리에게 비치는 모습은 단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예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 너머에 있는 자연의 영원함을 전율로 담아내야 한다. 그 예술 안에서 영원의 한 조각을 맛보게 해야 한다.
미술에는 문외한인 저도 이름 정도는 들어 본 폴 세잔의 글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며 "아, 미술하는 사람은 문장도 아름답고 세련되게 쓰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술보다는 철학이 친숙한 저는 위의 긴 글을 제게 익숙한 도구로 paraphrase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내 머리 구석에서 이 문장을 끌어올린 무의식의 의도를 알아채고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예술가는 판타 레이(Panta Rhei) 속 로고스를 찾아 보여준다.
파스칼 키냐르가 말했듯, 정말로 철학과 수사학은 대립합니다. 네 개의 긴 문장이 이토록 짧은 한 문장으로 재창조되었으니 말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변화한다"라고 주장한 철학자입니다. 판타 레이는 그리스어로 "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의미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한편, 그는 만물이 변화하지만 그것이 마구잡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 안에서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의 변화 뒤에 있는 영원불변의 무언가를 그는 로고스라는 단어로 정의했습니다.
오늘은 『오늘도 문장을 수집합니다』이니 철학 이야기는 이쯤 차치하겠습니다.
저는 제게 친숙한 언어로 재창조된 문장에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허리의 통증이 좀 가신 것 같아, 마저 전시를 관람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들을 둘러보니, 폴 세잔의 글을 찍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고 제 눈은 폴 세잔의 언어로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지만, 제 머릿속에서는
예술가는 판타 레이(Panta Rhei) 속 로고스를 찾아 보여준다.
라는 제 언어로 적힌 글이 재생되었습니다.
문득 "폴 세잔의 말을 내 멋대로 이렇게 요약해 버려도 괜찮은 것일까?"라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폴 세잔의 글을 요약하든, 요리를 해 먹든 별 상관 없겠지만, 최근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읽은 탓에 이런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나는 왜 폴 세잔의 글을 요약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요약의 동기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동기는 요약한 편이 기억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닿는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사라지지 않는가? 자연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우리에게 비치는 모습은 단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예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 너머에 있는 자연의 영원함을 전율로 담아내야 한다. 그 예술 안에서 영원의 한 조각을 맛보게 해야 한다.
이 글 전체를 외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판타 레이(Panta Rhei) 속 로고스를 찾아 보여준다.
이 한 문장 정도는 금방 외울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평소 판타 레이와 로고스, 이 두 용어에 친숙했다면 몇 초 만에 외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가 폴 세잔의 글을 요약한 동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요약할 때 "외우기 쉽게 요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러한 일을 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대답을 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얻은 답은 단순했습니다. 그저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폴 세잔의 글과 제가 만든 문장에서 공유하고 있는 언어는 거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판타 레이 속의 로고스인 것입니다.
폴 세잔의 말처럼 우리 눈에 닿는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사라집니다. 어린아이는 해변에서 모래성을 지으며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해변의 모래가 자신의 손에 의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윽고 몰려온 파도에 모래성이 다시 모래알 단위로 분해되어 버리는 것을 바라봅니다. 어떤 아이는 울고, 어떤 아이는 웃습니다. 어떤 아이는 부모에게 달려가고, 어떤 아이는 바로 옆자리로 옮겨 새로운 모래성을 짓습니다. 그들은 판타 레이 그 자체를 자신들의 놀잇감으로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 모래성 이야기의 뒤편에 존재하는 로고스를 감지합니다. 비단 모래성 놀이 일화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적용되는 영원불변한 한 이야기를 감지합니다. 판타 레이를 즐기고 그 안에서 로고스를 찾는 이 원초적인 놀이는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문장을 수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어는 늘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맥락, 작가, 조합, 그리고 글씨체 등에 의해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책 속에 있던 문장이 제 손과 펜을 통해 제 노트로 옮겨지는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변화입니다. 그 문장은 이제 제 노트에 있으니 제 문장입니다. 제가 해석하기 나름이고, 제가 요약하기 나름입니다.
오늘은 특히 흥미로운 언어의 변화를 목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문장 수집 노트에 기록합니다. 그 변화에 집중할지, 아니면 존속된 로고스에 집중할지, 예술의 언어와 철학의 언어의 차이는 무엇인지, 수사와 철학의 차이는 무엇인지, 노트에 적힌 문장을 보고 앞으로도 계속 사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눈에 닿는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사라지지 않는가? 자연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우리에게 비치는 모습은 단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예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 너머에 있는 자연의 영원함을 전율로 담아내야 한다. 그 예술 안에서 영원의 한 조각을 맛보게 해야 한다.
예술가는 판타 레이(Panta Rhei) 속 로고스를 찾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