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적 재난은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된다
<오늘도 문장을 수집합니다> 시리즈를 읽어오신 분이라면, 혹은 제 브런치 글을 많이 읽어오신 분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 멋진 산책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산책로는 가히 '숲'이라고 부를 만큼 넓고 나무로 가득 차서 언제나 멋진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숲이 녹색으로 가득 찹니다. 그때마다 햇빛에 따끈하게 달궈진 나무 벤치에 앉아 바로 앞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빠지기도, 독서를 하기도 했습니다. 시원한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돌탑을 쌓은 뒤 다음 날에도 잘 서 있나 확인하러 오기도 했습니다.
가을에는 숲이 노랗게 물듭니다. 그때는 벤치에 앉기보다는 걷기를 더욱 선호합니다. 바닥에 내려앉은 단풍 중 유독 예쁜 모양을 간직한 잎사귀를 하나 집어 이리저리 흔들며 돌아다니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손에서 사라져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한겨울에는 숲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오랜만에 산책이나 하고 들어갈까?" 하고 숲으로 향했는데,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잔뜩 어색함을 느끼곤 "아, 내가 겨울에는 이곳에 온 적이 없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일단 겨울에는 산책을 잘 안 나갑니다. 춥기 때문입니다. 가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집 바로 앞을 빙글빙글 도는 정도는 했지만, 산책로까지는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겨울의 숲은 털을 짧게 밀어 핑크빛이 도는 강아지를 보는 듯한 기묘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산책로는 관리가 안 되어—따로 관리되지 않는 산책로라는 사실은 가을에 신발이 푹 들어갈 정도로 단풍이 쌓였을 때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빙판이 되었습니다. 조심조심 한 걸음 내딛는데, 숲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앞을 가리는 잎사귀가 사라져 숲의 전체가 훤히 보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 걷는 방향대로 산책로를 조심조심 걸어가는데, 오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숲의 출구가 이미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나무의 풍성한 잎 때문에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거리에서 숲의 출구가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주 멀지는 않아도 "이제 슬슬 도착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도 몇 분은 더 걸리는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문장 수집 노트엔 아직 적히지 않은 문장입니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나온 문장이었습니다.
파국적 재난은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된다
이 문장은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은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된다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에로스의 종말>에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이 책에서 에로스(쉽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는 자신을 비우도록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자신의 부정. 즉,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디저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 음식은 물론, 단 음료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초코우유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때 제가 좋아하는 여학생이 초코우유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론 저도 편의점에서 초코우유를 두 개씩 사서—당시 특정 브랜드의 초코우유가 1+1 행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하나는 제가 마시고 하나는 그 친구를 줬습니다.
유치한 예시이지만, 이는 분명한 에로스에 의한 자기 비움의 사례입니다. 초콜릿 우유를 싫어하는 사람도 에로스를 경험하면 한 달에 수십 개의 초콜릿 우유를 마시게 됩니다. 친한 친구 혹은 가족이 연인과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는 것을 목격한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저 사람 누구야? 내가 아는 OO이 맞나?" 하게 됩니다. 에로스는 누군가의 신념을 무너뜨립니다. 삶의 방식을 무너뜨립니다. 에로스 앞에서는 "내가 내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온데간데 사라집니다. 나는 죽습니다. 이는 나의 완전한 패배이지만 동시에 선물입니다.
자신을 비웠을 때 비로소 타자가 자신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타자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 비움은 에로스의 전제 조건입니다. 성경에서도 인류를 향한 신의 사랑을 자기 비움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중략)...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 빌립보서 2장 6-7절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을 풍성하게 만드는 데에 집중합니다. 채울 수 있는 만큼 꾹 눌러 꽉꽉 담습니다. 그리고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풍성한 잎을 보며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아의 숲 속에서 우리는 숲의 밖을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알록달록한 잎만 바라봅니다. 이 모든 과정은 꽤 유쾌합니다.
하지만 만약 길을 잃은 기분이 든다면, 방황하고 있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때는 비워내야 합니다. 이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겨울바람에 떨리는 나뭇가지의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잎을 비워내면, 비로소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들어온 입구부터 나아가야 할 출구까지 훤히 보이게 됩니다. 방황하던 우리에게 죽음이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되는 것입니다.
파국적 재난은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된다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채우지만, 한 계절만큼은 모든 것을 비워내는 이 숲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훤히 보이는 길을 따라 숲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문장 수집 노트를 꺼내, 겨울 숲이 알려준 깊은 가르침을 생각하며 새로운 문장을 수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