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지가 아닌 여행지를 향해

진정한 여행자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by 이다이구

어느 날 어두컴컴한 방에 홀로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려고 누운 지 한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 켜도 눈이 부시지 않을 작은 조명만을 키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이제 무얼 해야 하나, 내일은 무얼 해야 하나,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어처구니없는 것이 의미를 가지다 이내 금방 사라지고, 필수적인 것이 의미를 잃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의미를 지니게 되고를 반복했습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가치의 위계질서에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종이와 펜을 들었지만, 종이에 펜촉이 닿자마자 사유는 깨지고 글자의 형태조차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펜을 그저 빙글빙글 돌리며 만들어낸 종이 위의 검은 소용돌이는 곧 종이의 여백뿐만 아니라 제 모든 생각도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에 의해 안심하고 편안을 느끼는 사람인지라,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이 상황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느껴졌습니다. 생각도 할 수 없고 글자 하나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나'라는 의미와 가치가 모두 증발해 버리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펜을 내려놓고 자성을 잃어버린 나침반처럼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문장 수집이나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생각이 많아지거나 우울한 날에는 철학 공부를 하거나 문장 수집을 하는데, 지금은 철학책이 전혀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아서 문장 수집을 하기로 했습니다.


문장 수집을 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책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좋은 문장을 문장 수집 노트에 옮겨 적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문장들을 수집해 놓은 사이트나 SNS 계정에 방문해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수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제 주변을 둘러보는 것입니다. 핸드폰 갤러리, 노트, 다양한 물건들, 지금 듣고 있는 노래 등에서 문장을 찾는 것입니다.


방은 어두컴컴하니 방의 물건들에 적혀 있는 문장을 찾기는 어렵고, 노래를 듣고 있지도 않았으니 일단 핸드폰을 켜고 갤러리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평소 문장이 적혀 있으면 일단 사진으로 남겨 둡니다. 문장을 읽기도 전에 말이죠. 그래서 갤러리에 들어가면 "오, 이런 문장도 찍어 놨구나" 싶은 사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진을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진정한 여행자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에드가 드가의 문장입니다. 사실 에드가 드가에 대해서는 발레리나의 그림을 주로 그리는 인상주의 화가라는 정보밖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핸드폰의 스크린을 물끄러미 몇 분간 바라보았습니다. 이 문장이 마음에 들긴 했는데 왜 마음에 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문장 자체는 약간 클리셰적인 부분도 없지 않고, 아름답다고 느껴질 만큼의 문장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 문장 수집 노트의 퀄리티 유지를 위해 신경 쓰고 있기 때문에 깐깐하게 문장을 심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장이 마음에 든 이유는 단순히 요즘 "여행" 혹은 "여행자"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항상 삶을 여행이고 자신을 여행자로 비유하는 메타포를 마음속에 담아 두며 살고 있습니다. 또한 마치 여행하듯 인생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으며 살았습니다. 아마 그 이유 때문에 저 문장이 그리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을 겁니다.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마치 여행하듯 인생을 살겠다 다짐해 놓고, 그렇게 살기로 스스로 약속해 놓고 늦은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다음 도착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여행자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 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마치 발레리나의 동작에 아름다움이 그녀의 손끝과 발끝에 순간 머물다 떠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에드가 드가는 그 순간을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여행자는 길 위를 걸어야 비로소 여행자가 됩니다.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한 곳에 정착해 버리면 더 이상 여행자는 여행자가 아니게 됩니다. 여행자의 존재 가치는 오직 길 위에서만 생깁니다.


저는 밤늦게까지 일어나 종이 위에 잉크 소용돌이를 만들며 다음 도착지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정착해서 안정감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행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조급함으로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저 가고 싶은 곳으로, 그리고 그곳까지 이어지는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다음 여행지로 발걸음을 옮기면 되었는데 말입니다.


진정한 여행자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갤러리의 문장을 문장 수집 노트에 옮겨 적고, 내일 떠날 여행지에 불안함이 아닌 설렘으로 잠을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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