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기억보다 흐릿한 잉크가 낫다
요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는 그런 시기입니다. 책을 읽을 겨를도 없어서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항목이 추가만 되고 줄지는 않고 있습니다.
1 년에 보통 25-30 권의 책을 읽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리스트를 확인해 보니 18권 읽었더군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애매한 권 수 인 것 같습니다. 애매한 건 싫으니 어떻게든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20권은 채워야겠습니다.
"와... 벌써 11월이야. 올해도 다 갔네"
했던 것이 며칠 전 같은데 어느새 12월입니다. 연말에 누구나 그러듯 저도 새해에 야심 차게 계획한 올해 목표를 과연 얼마나 이루었는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세운 목표들은 정량적으로 잴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히 몇 개를 이루었다 말하기 힘듭니다. 뿌듯할 정도는 아니지만 스스로에게 나무랄 정도도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직 20일 정도 남았으니 "시간은 아직 있다..."라는 마음가짐입니다. 시간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는 제 특성입니다.
올해에는 어떤 기록들을 했나 하고 노트들도 꺼내 읽어보았습니다. 당연히 문장 수집 노트도 꺼내 읽어보았습니다. 가장 최근에 기록한 문장은 아래의 문장입니다:
그녀는 독서가 인간의 고상한 활동이 아니라 동물도 해낼 수 있는 뭔가 아주 단순한 일이라는 듯 책을 읽는다.
제 기억이 맞다면 <닥터 지바고>에서 수집한 문장입니다. 원래 어디서 발췌된 문장인지 적어놓는데 이건 안 적혀 있군요. 찾아보고 적어놔야겠습니다.
올해 처음 적은 문장은 헤겔의 문장입니다.
보다 높은 이상이 없다면, 인류는 쉬지 않고 일하는 개미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올해 여러분 모두 열심히 일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열심히 일을 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노동의 목표가 생존 때문이라면 우리는 정말 개미와 다를 게 없으니깐요. 기왕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생존보다 높은 이상을 꿈꾸고 목표를 세워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살 때 제 인생의 목표 세 가지를 정해놨습니다. 장난스럽게 "위대한 목표"라고 칭합니다. 이러면 뭔가 만화의 주인공 같은 기분이 드니깐요. 그 목표 세 가지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올해 헤겔의 책을 읽은 기억은 없는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문장을 찾아왔는지가 의문입니다.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이런 걸 보면 "선명한 기억보다 흐릿한 잉크가 낫다"라는 중국 속담이 떠오릅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선명한 기억보다 흐릿한 잉크가 낫다
이 문장도 제 문장 수집 노트에 있습니다. 이 문장은 발화되었을 때보다 잉크로 기록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문장 같습니다. 그런 의미가 조금은 웃기기도 해서 제 노트에 적혀 있는 이 문장을 보면 웃음이 지어집니다. 이 문장이 스스로 자기 PR를 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록이라는 것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연말에 그 해 동안 쓴 일기를 읽어본 적이 있나요? 기분이 참 이상합니다. "아 이런 일도 있었지" "이땐 이랬지..." 하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다 보면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느낀 1 년이 사실은 너무나 길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1년 동안 그토록 많은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고통과 회복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걸 모조리 잊어버리고 "시간이 너무 빠르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10월 31일에 적힌 일기장처럼 말이죠.
이제 10월이구나... 2025년도 거의 다 지나갔네... 했는데 눈 떠보니 내일이면 11월이다. 시간 정말 빠르다.
일기뿐만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적어놓는 노트, 문장을 수집하는 노트, 독서기록 노트 등 다양한 주제의 노트들을 보면서 나의 생각과 취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행위이고요.
저는 일주일에 보통 두 편 정도의 글을 브런치에 발행하는데 올해 초의 글을 읽어보면 지금과는 사뭇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무엇이 더 좋다 안 좋다를 평가할 정도의 글도 아니지만 확실히 작문의 스타일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글쓰기를 하면서 스스로 깨달음 점과 개인적인 취향 변화의 결과입니다.
"자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연속적인 기억"입니다. 만약 제가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지금의 저와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의 저는 완전히 다른 객체라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그만큼 연속적인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요소를 우리는 "기억"이라는 매우 불완전한 도구에만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너무나 달라져버린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어 줄 중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자아 성숙의 여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게 될 겁니다.
그러니 기록합시다.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미래의 나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이 소중한 정보가 미래의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는 일이니깐요.
선명한 기억보다 흐릿한 잉크가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