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주주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 때문이란다

by 이다이구

이따금 씩 주변인들로부터 책 추천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비문학이라면 저는 고민 없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를 추천합니다. 하지만 소설책을 추천해 달라 하면 난감해집니다. 그들은 뭔가 나만 알고 있는 정말 재미있고 동시에 깊은 책을 소개하길 바라는 눈치인데 적절한 책을 떠올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너무 분량이 많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너무 암울하고,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독서 입문자에겐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히가시노 게이코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이 적절하다고 생각되지만 너무 메이저 한 작가들이라 오히려 싫어하는 눈치입니다. 그리고 뭔가 깊은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나 봅니다.


독서 입문자에게도 쉽게 읽히고, 플롯이 흥미롭고, 너무 메이저 하지 않고, 동시에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소설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장수집노트를 읽어보면 뭔가 힌트를 얻을까 싶어 뒤적거리던 중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 때문이란다.


그리고 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위의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소설이 바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라고 말입니다.


"잠깐 어린 왕자가 메이저 한 책이 아니라고?"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어린 왕자는 경전들을 제외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 3위 안에 듭니다. 무려 2억 부 이상 팔린 책이죠.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어린 왕자만큼 안 읽힌 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왕자>는 귀여운 일러스트와 동화 같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린 왕자>가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착각합니다. 저 또한 어린 왕자를 아주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처음 읽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교과서에서 초등학교 때 한 번 더 읽었습니다. 그리곤 안 읽다가 약 1년 전에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난 어린 왕자를 읽은 적이 없었구나"


애초에 어린 왕자는 어른들을 위한 책입니다. "어른들은 참 이상해"라는 어린 왕자의 말은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 된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어린 왕자>는 한치의 과장도 없이 성인 필독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 왕자를 어렸을 때만 읽고 내용을 다 안다고 착각한 뒤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고 낙인찍은 뒤 다시는 펼치지 않습니다.


작년 어린 왕자를 '처음' 읽은 뒤 저는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어린 왕자만큼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은 정말로 손에 꼽습니다.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 때문이란다.


그 사람이 잘생기거나 예뻐서, 혹은 특출 나서 나의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한 시간이 그 사람을 소중하게 만들어 줍니다. 함께 보낸 시간이 그 사람을 나의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 3년 정도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저에게 3년 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니 되게 정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보면 길고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과 보낸 3년은 저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제 인생의 3년 치는 그들의 소유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때를 추억할 때 제 자신이 아닌 함께 한 사람들을 떠올릴 테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제 인생의 지분을 가진 "내 인생의 주주들"입니다.


내 시간을 누군가에게 소비했다는 것은 곧 나의 인생의 일부분을 떼어 그 사람에게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특출 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까? 아니면 배드엔딩으로 끝났습니까?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분의 인생의 일부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 사람을 증오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은 대개 소중한 사람에게 향합니다. 어린 왕자의 자신의 별에서 장미와 다투고 여정을 떠나듯 말이죠.


문장수집노트에 적힌 여우의 조언을 읽으며 과거의 소중한 인연을 떠올리고, 지금 나의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을 떠올려봅시다. 수 천 개의 장미꽃 중 나의 특별한 장미꽃을 찾는다면 어린 왕자의 몽환적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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