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뒤 달이 나왔다. 비에 씻긴 가을밤이 청명하게 밝아졌다.
저에게 집은 잠을 자는 곳입니다. 반지하에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제 방이 싫어서가 아니라 워낙에 혼자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탓입니다. 보통 밤 11시, 어떤 때에는 12시가 다 되어야 집에 들어옵니다. 쉬는 날에도 어김없이 근처 카페나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건 몸에 새겨진 생체코드 같은 것이라 제가 어찌할 방도가 없는 저의 특성입니다. 아버지도 주말에도 홀로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렇습니다. 부전자전, 아버지와 제 유전자에는 밖을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코드가 새겨져있나 봅니다.
요즘 제가 사는 곳은 날씨가 제법 선선합니다. 낮에는 17-18도 정도, 밤에는 10도 정도입니다. 덕분에 좋아하는 카디건도 꺼내 입고 단풍 구경하는 재미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주부터 계속 내리는 빗줄기가 단풍줄기를 툭 끊어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예보에 의하면 앞으로 일주일은 계속 비가 내린다고 하니, 다음 주부터는 단풍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단풍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욱 애틋해지기도 합니다.
며칠 전, 비가 오는 저녁에 툭툭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11시, 도서관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이제 곧 내가 좋아하는 검은색 코트도 꺼내 입겠구나 하고 입김을 만드며 걷다 보니 어느새 우산을 두들기는 소리가 잠잠해졌습니다. 잔잔히 내리던 비가 멈추었습니다. 우산을 살짝 들추어 고개만 빼꼼 꺼내어 하늘을 확인하고 우산을 접어 탈탈 털어낸 뒤 가방에 집어넣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하늘을 바라보며 늘 하던 놀이를 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 놀이라 함은 별자리 찾기와, 목성, 토성, 금성, 그리고 화성을 찾는 것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시내에서 꽤 벗어난 외곽지역이라 저녁에는 꽤 많은 별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에 별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달, 약간 찌그러지긴 했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달이 어느 때보다 환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위성이 작은 별들의 빛까지 모조리 집어삼켜버렸습니다.
그때 한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아니, 문장의 실루엣만이 떠올랐습니다. 가을, 비, 그리고 달..... 키워드는 떠올랐지만 정확히 어디서, 또 누가 쓴 문장인지는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문장의 실루엣을 더듬으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장 수집 노트를 꺼냈습니다.
비가 그친 뒤 달이 나왔다. 비에 씻긴 가을밤이 청명하게 밝아졌다.
소설 <설국>으로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장이었습니다. <이즈의 무희>라는 소설에 등장한 문장 같습니다.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이즈의 무희>를 아직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읽어본 적도 없는 소설의 문장이 어떤 연유로 제 문장 수집 노트에 적히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비에 씻긴 가을밤"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감탄했습니다. 아마 예전의 저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읽어본 적도 없는 소설의 문장을 제 노트에 옮겨 적었나 봅니다. 그는 이 문장으로 "비에 씻긴 가을밤"을 창조해 냈습니다. 그의 문장 전에는 이 세계에 "비에 씻긴 가을밤"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이 문장을 접한 사람에게는 "비에 씻긴 가을밤"이 존재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창문 밖으로 빗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대략 세 시간 전부터 비가 후드득 쏟아지더니 이제는 잠잠해진 것 같습니다. 지붕에서부터 관을 타고 흐르는 빗물 소리만 들립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비에 씻긴 가을밤을 마주하러 가야겠습니다. 이 전에는 없던 새롭게 탄생한 가을밤을 맘껏 즐기러 갑니다.
비가 그친 뒤 달이 나왔다. 비에 씻긴 가을밤이 청명하게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