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린다'냐 혹은 '쏟는다'냐도 의지에 달렸다
요즘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철학 원서를 읽는 것은 오랜만이라 꽤나 진땀을 빼며 읽고 있습니다. 인문 고전을 초독할 때는 이해를 못 해도 일단 페이지를 넘기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 격언을 마음속으로 의식하머 얼른얼른 페이지를 넘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은 욕심과 이해할 수 있다는 교만으로 무려 1시간 동안 고작 18페이지 만을 넘겼습니다.
날씨 좋은 어느 날 집 근처 도서관 1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1층은 작은 소음은 어느 정도 넘어가주는 분위기라 도서관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시끌벅적합니다. 친구와 함께 체스를 두는 사람들, 서너 명이 모여 그룹 과제를 하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까지(원칙상 식음료는 반입불가이지만 음료는 암묵적으로 허용해 줍니다).
떠들썩한 분위기지만 통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햇볕과 넓은 개방감, 무엇보다 즐거워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아 가능하다면 1층 자리를 고집합니다. 나머지 층에는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자리를 잡고 팡세를 읽기 시작했는데 영 집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소음 탓인지, 어려운 단어 때문인지, 아니면 눈을 시큰하게 만드는 하얀 햇빛 때문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잠깐 핸드폰을 켜고 인스타를 봤습니다. 인스타에서 가수 이찬혁의 파노라마 무대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작년 11월 29일, 제45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의 무대였습니다. 한 손에 샴페인을 들고 음악에 몸을 흔드는 멋진 무대였습니다. 밴드 세션은 유럽의 역병 의사를 떠오르게 하는 복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딴짓을 좀 하다가 다시 팡세에 집중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복한' 마차인가 '전복된' 마차인가는 의지에 달렸다. '흘린다'냐 혹은 '쏟는다'냐도 의지에 달렸다
이 문장을 읽으니 아까 보았던 무대 영상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가수 이찬혁 씨의 오른손에 들린 샴페인 잔입니다. 샴페인은 이찬혁 씨가 몸을 흔들 때마다 잔 속에서 가수를 따라 춤을 추듯 위아래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다 이따금씩 잔 밖으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찬혁 씨는 샴페인이 흘리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듯 오히려 더 거세게 몸을 흔들었고 결국 샴페인 잔을 가득 채웠던 샴페인은 모두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찬혁 씨는 잔마저 미련 없이 던져버렸습니다.
팡세를 쓴 블레즈 파스칼은 불과 13살의 나이에 파스칼의 삼각형을, 16살에는 파스칼의 정리를 증명하는 등 말 그대로 수학의 천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학과 철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가 수학에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시간의 대부분을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는 데에 바쳤습니다. 그런 그를 보고 수학적 재능을 꽃피우지 못해 아깝다는 평가가 많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확고하게 정해둔 것입니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나머지를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자시느이 손에 들려있는 샴페인을 쏟아버린 것입니다. '흘린다'와 '쏟는다'는 의지에 달렸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막연하게 생각할 뿐 정확히 무엇이 1위이고 2위인지는 헷갈려합니다. 심지어 그 우선순위는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전제 아래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상징하는 역병의사 밴드의 연주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는 황급히 운선순위를 정합니다. '영원히 살 것'이라는 전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고정보다는 변화를, 안정보다는 도전을, 익숙한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잘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둡니다. 그리고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새롭게 짜인 가치의 위계 아래서 허겁지겁 시간을 보냅니다. 죽음의 밴드가 노래할 때 우리는 손에 잔뜩 들고 있던 샴페인을 흘리며 "이렇게 죽을 순 없어"라고 외칩니다.
파스칼은 33살에 큰 마차사고를 경험하게 됩니다. 타고 있던 마차를 끌던 말의 고삐가 풀려버리며 마차가 튕겨져 나갔고 말까지 죽게 된 아주 큰 사고였지만 파스칼은 운 좋게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이 죽음의 순간 앞에서 파스칼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했습니다. 그날 이후 파스칼은 자신이 지금까지 명성을 날리고 재능이 있었던 수학이 아닌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학문인 신학과 철학 집중하기로 합니다.
그는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되지만 파스칼은 분명 그의 인생에서의 승리자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미련해 보여도 자기 자신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는 멋지게 샴페인을 쏟아버리고 잔마저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행복해할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도전, 변화, 새로운 경험, 그리고 좋아하는 일만 하고는 살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흔릴바에는 쏟아버리는 게 나을 때가 분명 있습니다. 선택은 동시에 포기입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잔을 아슬아슬하게 들고만 있다면 춤은커녕 제대로 서있기도 힘듭니다. 죽음의 기로에서 깨닫는 것은 너무 늦습니다. 지금 시간이 있을 때 나에게 정말 의미와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현명할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선택했을 때 포기해야 할 것들은 이찬혁 씨가 그랬듯, 블레즈 파스칼이 그랬듯 미련 없이 쏟아버립시다.
부록:
이찬혁(LEE CHANHYUK) - ‘파노라마+장례희망' 축하공연 [제45회 청룡영화상 시상식] [제45회 청룡영화상 시상식] | KBS 241129 방송 링크
https://youtu.be/pwGIatI28Ts?si=CnhRme_832oF_9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