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누구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한 가지는 있기 마련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산책을 나가거나 철학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잡생각을 하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기란 웬만한 천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죠. 운 좋게도 저는 그런 천재가 아니어서 철학 공부를 할 때에는 잡생각 없이 온전히 집중할 수 있습니다.
또 괜히 노트를 뒤적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주 오래전에 쓴 일기를 읽기도 하고, 오래전 수업필기를 읽기도 하고, 예전에 수집한 문장도 읽습니다. 오늘도 그런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요즘 왠지 정신이 없고 정신적 피로가 쌓인 터라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철학공부도 하고 필사노트에서 오래된 문장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
다자이 오사무의 <여학생>에 나오는 이 문장은 언뜻 보면 희망찬 문장처럼 보입니다. 오늘 하루만 지나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뜻인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아주 슬픈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하루만 기다리면 행복이 찾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같은 희망찬 문장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은 행복에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라지면 그제야 주인이 없는 집에 찾아온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주인은 행복을 영원히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은 다자이 오사무 본인을 담은 문장이기도 합니다. 그는 다섯 번의 시도 끝에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의 행복도 하룻밤 늦게 찾아와 허탕을 치고 돌아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가 단 하룻밤만 더 살았어도 무언가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는 행위가 아닙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일 죽을 가능성, 혹은 계속 살아갈 가능성, 로또에 당첨될 가능성, 오늘 아침에 토스트를 먹을 가능성, 내일 점심에 우연히 지인을 만날 가능성, 행복할 가능성. 어떤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어떤 가능성은 꽤 높은 확률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자신의 존재에 품은 채 매 초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살아간다'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가능성의 포기입니다. 죽음 뒤에는 죽음이라는 오직 한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확실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이란 다른 말로 불확실성이니 말입니다.
폴 발레리라는 프랑스의 시인은 <해변의 묘지>라는 아름다운 시를 씁니다. 화자는 어느 날 정오, 해변의 묘지에서 조용히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봅니다. 장엄한 자연 앞에 여느 인간이 그러듯 화자도 영원성에 대해 사색합니다. "인간은 무한과 유한, 영원과 시간성,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라는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인간에게 영원이란 늘 매력적인 사색의 대상입니다.
영원에 대해 사색하니 화자는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아름다운 해변에서 자신의 서있는 묘지로 옮기게 됩니다. 묘지에는 수많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사색합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피부에 닿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말합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다가 막상 자신이 살아야 할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지난 스트레스받는 일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면 우리의 정신은 늘 과거에 머물게 됩니다. 다가올 불확실성, 혹은 언제 올지 모르는 행복에만 신경을 쓰면 우리의 정신은 늘 미래에 머물게 될 겁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모두 쓸모없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과거와 미래에 정신을 빼앗겨 막상 '지금 살아있음'을 놓치게 된다면 결국 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치 청춘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 청춘을 모두 보내버리는 사람과 같지 않겠습니까?
가끔은 나를 반기는 바람을 느끼며 내가 지금 살아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일은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행복은 내일모레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희망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희망에 살아선 안됩니다. 희망은 품되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헛된 희망을 품다가 결국 하룻밤 늦게 찾아오는 행복에 배신당해 삶의 의지를 잃은 예시들이 나옵니다.
"살아야겠다"는 불확실의 세계로 탐험을 하겠다는 표명입니다. 죽음은 확실하지만 삶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한 과거와 확실할 것으로 가정한 미래에 몸담으려 합니다. 하지만 어디서 불어온 지도 모른 채 여기저기 부딪치다가 우연히 내 몸에 닿은 바람은 우리를 다시 불확실의 세계로 돌려보냅니다.
오늘 피곤하듯이 내일도 피곤할 듯합니다. 오늘 스트레스받았듯이 내일도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 불확실의 세계에서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으니 직접 살아봐야겠습니다. 오늘을 살아보니 풀을 뜯어먹는 사슴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제 일상에 사슴 무리가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사슴입니다. 살아야겠습니다. 살아보고 다시 살아보고, 바람이 불면 또다시 살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