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그저 지나갑니다
저에게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페스트, 어린 왕자, 죄와 벌, 싯다르타 등 제가 좋아하는 소설은 너무나 많지만, 그들 사이에 위계를 세우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은 무엇이냐 하고 물어본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입니다. 짧은 분량과 쉽게 읽히는 근대 일본 문학의 특징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인간실격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꼭 읽는 것 같습니다. 인간실격의 주인공인 요조를 누구는 인간쓰레기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누구는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누구는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한 캐릭터를 가지고 이렇게 의견이 갈리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겁니다.
인간실격을 여러 차례 재독한 제가 요조에 대해 평가하자면, "요조는 겁쟁이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조는 겁쟁이입니다. 선택을 두려워합니다. 세상 그 어떤 일이든 자신이 개입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심지어는 행복도 두려워합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사실 비슷한 느낌의 문장들은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 폭풍 전 바다는 늘 고요하니깐.
혁오의 노래 TOMBOY의 가사입니다. 위의 예시 말고도 이런 메시지를 담은 노래 가사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인간실격은 겁쟁이의 수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조의 도덕성을 비판하기도, 동정하기도, 그의 도덕성을 칭찬할 수도 있는 이유가 그는 대책 없는 겁쟁이이기 때문입니다.
겁은 참 애매한 속성입니다. 기본적으로 겁은 미덕과는 거리가 먼 개념입니다. 누구나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겁쟁이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겁은 도덕과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겁쟁이는 다른 사람을 화나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아 합니다. 겁쟁이의 조심스러운 태도은 도덕적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인간실격을 여러 번 재독 하다 보면 어느새 요조에게 공감을 느끼는 자신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저는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차일피일 결정을 미룬 적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만든 선택에 따른 책임과 내가 포기해야 할 나머지 선택지들에 겁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찾아오면 저는 가능성의 상태에 머무길 선택합니다. 가능성의 상태에서는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어느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가능성의 세계 밖에는 확정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두려운 세상입니다.
얇은 두께에 만만히 생각하고 읽게 된 소설에서 저는 그런 제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선택은 곧 자유의지를 의미합니다.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뺴앗는다면 도대체 뭐가 남을까요? 그대로 인간실격이 되지 않을까요?
제 문장수집노트에는 인간실격의 문장들이 많이 적혀 있습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가 됩니까?
사람이란 주먹을 꽉 쥔 채 웃을 수는 없는 법이다.
겁쟁이는 행복조차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같이 유명하고 누구나 아는 문장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새로운 문장을 하나 더 적어 넣으려고 합니다. 인간실격의 결말에 쓰여있는 문장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다자이 오사무가 세상 모든 겁쟁이들에게 해주는 위로 같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은 가끔은 우리에게 너무 잔인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때도 지나가고, 즐거운 때도 지나가고, 사랑하는 시간도 지나갑니다. 그 순간에는 손가락 끝마디도 다시 담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저 지나간다는 말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는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는 다를게 살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매 순간마다 우리는 새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든 그저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은 용기를 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실수도, 잘못된 선택도 결국엔 그저 지나갑니다.
문장을 노트에 적어놓았습니다. 이 순간도 그저 지나갑니다. 늦은 시간까지 저를 깨어있게 만드는 여러 생각과 미처 나온 지 못한 말들도 그저 지나갈 겁니다. 이제 문장을 노트에 적어놓았으니 지금 당장 이 문장이 할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노트를 덮습니다. 이 순간이 지나고 수많은 시간이 지나가면, 언젠가 이 문장이 또 할 일이 생길 겁니다. 아마 미래의 겁쟁이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거나 위로를 해주거나 하는 그런 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