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것들의 변호

유용하지 않다고 불리는 학문 없이 사는 것이 과연 진정한 삶인가?

by 이다이구

"만약 철학을 배우면 쓸모가 있어?"


몇 개월 전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떤 연유로 이런 이야기가 흘러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철학적인 이야기는 물론 진지한 이야기도 잘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왜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나누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질문 이후로 대화는 더욱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다들 제가 대답하길을 기다리는 듯 보였습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나마 철학의 세계와 맞닿아있을 것 같은 사람이 저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2초 정도 철학의 쓸모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철학의 쓸모라는 제목의 책도 있는 만큼, 철학에는 반드시 어떠한 실용성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몇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니. 철학은 쓸모없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온갖 난해한 철학 용어가 튀어나오고 장황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 모습 자체가 쓸모가 없는 철학을 구차하게 변호하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일 것 같았습니다. 둘째, 철학은 실제로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배운다고 해서 생존에 유익을 얻거나, 커리어에 도움이 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인생에 그리 큰 도움을 주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지금껏 읽은 자기 계발서가 수십 권이 넘을 테지만, 그중 쓸모 있었던 책은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책들이 말하는 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토아 철학이니, 실존주의니, 경험론이니, 인식론이니, 허무주의니 해도 결국 그것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러분 책장 구석에 처박혀 먼지만 쌓이고 있는 자기 계발서와 마찬가지로 쓸모를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과연 철학을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쇼펜하우어는 친구를 두지 말고 혼자 살라고 조언하지만 정작 본인은 저녁식사에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고 절친한 친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인 쇼펜하우어에게도 철학을 자신의 삶에 온전히 적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조리 철학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합니다.


음식을 가득 차려놓은 식탁에 앉아서 자살을 논했다는 쇼펜하우어의 경우는 흔히 우스갯거리로 인용되곤 한다.


철학은 쓸모가 없습니다. 철학이 밥 먹여주지 않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몇 주 전의 이야기입니다. 제 노트북에는 Essai라는 폴더가 있습니다. Essai는 "시도하다"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단어입니다. 영어의 Essay,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세이의 어원이기도 하죠. 저는 이 파일에 여러 시도적인 글들을 적습니다. 운이 좋아 꽤 다듬새가 괜찮은 글이 나오면 브런치에 발행하기도 합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저는 Essai 폴더 안에 "철학의 쓸모"라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글은 전술한 "난해한 철학 용어가 튀어나오고 장황한" 철학의 쓸모를 변호하는 문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복잡한 변호문 속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와 의도하지 않게 도치된 문장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잠깐의 휴식이 간절해진 저는 마무리도 하지 않고 아나톨 프랑스의 "에피쿠로스 정원"으로 무책임한 도피를 했습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은 절대 진리는 아닌 듯합니다. 저는 제 도피처에서 우연히 정답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실증주의가 씁쓸하고 안타까운 이유는 유용하지 않은 학문이라고 해서 너무 단호하게 금지하는 데 있다. 그런 학문이야말로 가장 애정을 쏟을 만한데 말이다. 유용하지 않다고 불리는 학문 없이 사는 것이 과연 진정한 삶인가?


쓸모없는 학문은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당합니다. "나는 쓸모없소. 하지만 그대들은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오." 라며 그 당당한 자태를 뽐냅니다. 인간은 쓸모없는 짓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바닷가에 풀어놓으면 누군가는 모래성을 쌓고 누군가는 조개껍데기를 모을 겁니다. 하나같이 쓸데없는 짓입니다. 모래성은 허물어질 것이고, 조개껍데기는 어느 순간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아이들의 쾌락과 집념, 그리고 애정은 분명 고귀합니다. 무의미한 일에 자신을 희생하는 해변가의 아이들은 누구보다 인간적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시가 아름다워서 시를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를 읽고 쓰는 이유는 우리가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것들을 위해 우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모래성을 짓고, 눈사람을 만들고,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을 하고, 실패할 도전들을 하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철학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행위 없이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쌍성을 꿈꾸는 등의 쓸데없는 일이 무조건 금지된다면 우리 중 일부는 지구에서의 삶을 아예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 문장들을 열심히 문장수집용 노트에 옮겨 적는 나의 이 행위도 쓸모없는 짓입니다. 이 문장들은 나를 밥 먹여 주지 않습니다. 내 커리어에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고요. 이곳에 투자한 시간이 수십, 수백 시간이 되어도 단 몇 초만에 불에 탈 수도 있고, 물에 젖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무의미와 존재의 위태로움에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인간이라면 누가 욕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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