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딘가에서 '피아노를 닮은 구름이 흐른다.'라는 표현을 써먹어야지
며칠 전 일입니다. 저는 뜨겁게 달궈진 거리를 반바지와 민소매를 입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늘 저 멀리에 바닥이 평평한 구름이 잔뜩 몰려있었지만 이틀은 지나야 비가 내릴 것 같은 그런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아는 지인을 만났습니다. 사실 알고 지내는 지인이 몇 없는 사람이기에 더욱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와 지인은 10초간 짧은 대화,
"어? 어디가?"
"그냥 산책하고 있어. 너는?"
"나 이 근처에 아는 사람 만나러 왔어"
"그래? 재밌게 놀아."
"너도 산책 잘해"
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평소엔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사이인데 왠지 모르게 조금은 어색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잘 아는 사람인데 왠지 처음 보는 사람 같은 느낌. 이를테면 군대 동기가 사회에서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숲길로 들어가며 그 짧은 우연한 만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집 근처에서 우연히 지인을 마주한 것 같은 즐거움"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문장을 내 글에 써먹어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그 뒤로 며칠 뒤,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 중 한 문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피아노를 닮은 구름을 보면 나는 생각합니다. 소설 어딘가에서 '피아노를 닮은 구름이 흐른다.'라는 표현을 써먹어야지, 하고 말입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산책로에서 혼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다닌 제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짓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문장수집노트에는 여러 작가의 문장들이 필사되어 있지만, 제가 만든 표현들도 써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비꽃에 남성용 향수를 뿌린 냄새
같이 랜덤 한 표현들이죠. 감정, 오감, 대화, 새로운 단어 등 많은 표현들이 제 노트에 적혀 있습니다. 이 표현들은 언젠가 노트에서 꺼내져 사용되는 날을 기다리며 긴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들이 언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몇몇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져서 그들을 보고도 "이걸 내가 썼다고? 난 기억이 없는데?" 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지금은 소설을 쓸 계획도 없고, 정보전달이 주목적인 제 브런치 글에 저런 표현이 들어갈 틈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하루를 살다가 "이 표현, 언제가 꼭 써먹어야지" 하고 문장수집노트에 또 새로운 문장을 적어 넣습니다. 아이들이 해변가에 모래성을 짓듯이, 읽지도 않을 책을 장롱 안에 쌓아두듯이, 쓸데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도 이 의미 없는 일로 제 가슴이 뜁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슴 뛰는 일은 모두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어차피 허무주의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일이 의미가 없으니 아무래도 좋습니다.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세상 속에서 제 행위가 다른 실용적인 행위보다 더 헛되다고 말할 순 없을 테니 말입니다. 아나톨 프랑스도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다음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쌓아 올리는 그 무엇도 남지 않을 테니, 고서에 대한 사랑이 다른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보다 헛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제가 장을 보러 가는 플라자에는 다양한 종류의 카드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주로 포켓몬 카드와 유희왕 카드를 파는 것 같고, 하키선수 카드, 야구선수 카드 등 다양한 종류의 카드를 판매합니다. 카드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서로 카드를 보여주기도 하고, 거래하기도 하고, 대결을 펼치기도 합니다. 카드에 흥미가 없어 가게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진지한 모습으로 카드대결하는 사람들이 신기해 먼발치에서 몰래 구경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는데 30대 초반 혹은 중반처럼 보이는 사람이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포켓몬 카드팩을 꺼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소중히 카드팩 포장지를 벗겨내고 한 장 한 장 그 안에 들어있는 카드들을 펼쳐 확인했습니다. 카드 한 장 한 장 정말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대했습니다. 총 다섯 장의 카드를 확인하더니 그는 그 카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곤 자신의 가방에 소중히 넣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가 드리우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아, 부럽다"였습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무언가를 깊게 애정하고, 수집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결하고, 열광하고 싶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자는 "그 나이에 포켓몬 카드나 사고 참 할 짓없나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가 할 짓 없는 짓에 대해 뭐라 할 자격이 있을까요? 결국 우리 모두 쓸데없는 일에 가슴이 뛰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포켓몬 카드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 띤 그 표정, 아마 며칠 전 숲길을 산책하는 저도 그런 표정이었을 겁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볼품없어 보이는 문장을 훑어보며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겠죠. 실제론 볼품없고 앞으로 쓸 일 일도 없는 문장들인데 말입니다.
쓸모없다곤 해도 멋진 활약을 꿈꾸는 제 노트 속 문장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진 않습니다. 언젠간 저 표현들을 써먹는 날이 오길 바라며 오늘도 문장수집노트에 이제껏 세상엔 없었던 문장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씁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문장이 언젠간 자신의 글에 멋있게 쓰일 날을 상상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당신이 말한 모든 표현과 단어를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나만의 문학 창고에 쌓아 두려 애쓰고 있습니다. 분명히 써먹을 데가 있을 거다 하면서요! — 안톤 체호프 <갈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