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은 나보다 뛰어나길

이름 없고 하찮은 사무원인 나는 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by 이다이구

저는 가끔 제가 선택한 전공에 대해 후회했습니다. 제 전공은 Professional Writing 입니다. 번역하면 전문적 글쓰기입니다. 글쓰기가 좋아서 이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글에 내 모든 걸 투자할 정도의 재능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나마 취업이 잘 될 것 같은 프로그램을 같이 복수 전공했습니다.


같은 글을 써도 어떤 교수님은 좋아하고 어떤 교수님은 못마땅해하셨습니다. 어떤 교수님은 당장 제 포트폴리오를 출판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또 다른 교수님은 수십 개의 피드백과 함께 참담한 점수로 제 글의 열등함을 지적했습니다.


글쓰기는 전공하다고 해서, 관심도 없는 주제로 10,000자 에세이를 써도 전혀 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론적인 글쓰기 테크닉은 배우지만 그걸 현실에서 '잘'써먹어을 기회는 잘 오지 않습니다.


문장을 짧게 써라. 그러다가 나열된 단어에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를 사용하며 긴 문장을 만들어 글 전체에 운율감을 주고 글의 텐션과 호흡을 적당히 배열하여 읽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고 작가와 함께 문장을 가지고 노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라. 그리곤 다시 짧은 문장.


하지만 제 경험상, 이런 테크닉을 사용한다고 해서 좋아하는 사람은 독자가 아니라 교수뿐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특정 기법을 사용한다고 좋은 글이 탄생하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맞춤법을 잘 맞춘다고 좋은 글이 되는 것도 아닌 거 같습니다. 재능. 오직 작가의 감각이 좋은 글을 탄생기키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4년간 대학에서 작문에 대해 배운 단 한 가지 진리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은 끈기와 성실함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작가로서 재능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끈기와 성실함은 "나다움"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개념들입니다.


처음으로 제 의지로 글을 쓴 건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제 첫 글은 늘 방학숙제로 억지로 해야만 했던 일기였습니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내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존재론적 두려움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 글은 자연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위한 문학이 아니라 실존적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투였습니다. 그러니 제게 끈기와 성실함은 필요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글 쓰는 그 순간의 자유와 존재감만 느끼면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부조리하고 앙상한 내 방 책상 앞에서, 이름 없고 하찮은 사무원인 나는 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의 문장입니다. 이 문장이 묘사하는 장면은 저의 모습과 매우 비슷합니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작은 방에서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제가 글을 씁니다. 제 문장이 나보다는 좀 더 낫길 바랍니다. 저는 이름 없고 하찮은 사람이지만, 저보다 더 뛰어난 문장을 노트 위에 탄생시키기 위해 고개를 노트에 처박고 볼펜을 이리저리 휘두릅니다.


그 글은 서두 없이 이리저리 뻗어나가고, 문장도 단어도 무엇 하나 탁월하지 못하고, 화려한 기법도 부재하지만, 내 영혼을 구원해 줍니다. 사실 영혼의 구원은 너무 거창하고, 적어도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기억하게 해 줍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뭘 배웠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 미래의 나에게 명확히 알려줍니다. 지금의 나는 미래에도 글로써 존재하게 될 겁니다. 그거면 됩니다. 무의식에 조차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질뻔한 나의 존재를 지켜줄 확실한 구원입니다.


멋진 글, 남에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글을 쓰고자 했을 땐 글을 도저히 쓸 수가 없었습니다. 제 문장 수집 노트에 적혀 있는 위대한 작가들의 글이 제 펜촉 끝을 주시하는 듯했고, 저는 어떤 글씨도 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내 부조리하고 앙상한 방 책상 앞에서, 이름 없고 하찮은 인간이 자신의 유희를 위해 글을 쓸 때는 무엇이든 써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페소아 같은 위대한 시인에게 조금은 뻔뻔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의 문장을 수집합니다.


이제 이 문장은 문장수집노트의 다른 위대한 문장들이 제 펜촉 끝을 쳐다볼 때 그들의 따가운 눈총을 막아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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