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10): 틈새

틈새와 행복

by 이다이구

나는 틈을 좋아한다.


틈은 안과 밖을 연결해 준다. 문틈새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리면 밖의 시원한 공기를 맡을 수 있다. 방 안의 공기는 금방 탁해지고 답답해서 이러한 행위는 보기엔 우스워도 나름의 쾌락이 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빛은 어두운 방에서도 어느 정도 사리분별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저 얇은 틈을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온 빛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한병철 교수는 그의 저서 “투명사회”에서 독일어로 행복을 의미하는 Glück은 빈틈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¹. 어쩌다가 빈틈에서 행복까지 이어졌을까 생각해 보았다. 단순히 오전 일과 오후 일 사이의 빈틈, 즉 휴식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해 보면 틈새에서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은 긍정적이다.


우리는 일과 일 사이의 빈틈에서 휴식을 취한다. 틈새시장에서 희망을 본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빈틈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틈새를 만들러 다닌다. 그 틈새는 현실의 틈새이다. 친구들과 만나 현실에서 잠깐이지만 벗어난다. 일주일에 하루는 성스러운 공간에 가서 초월적 경험을 한다. 영화, 만화, 드라마 등을 보며 공상의 세계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 틈새는 무엇일까? 무엇과 무엇 사이의 틈일까? 우리의 코를 그 틈새에 갖다 대고 킁킁거리면, 어떤 공기를 맡을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이 틈새 건너편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 친구들과 만나면 현실의 문제도 농담거리가 된다. 현실에서 큰 의미를 지니던 것의 의미가 축소되고, 별 의미 없던 것의 의미가 확대된다. 생산성보다는 즐거움이, 미래지향보다는 현실 집중이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일주일의 하루 종교 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의미의 역전이 발생한다. 심지어 절대자와의 조우로 자아마저 축소된다. 영화관에서 드디어 광고가 끝나고 모든 불이 꺼졌을 때, 관객들은 숨을 죽인다. 순간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그 분위기에 압도된다.


그 순간,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나’는 사라진다. 오직 존재하는 ‘나’만이 남는다. 현실적인 세계가, 즉 존재자의 세계가 잠시 멈춘다. 그 건너편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다. 미래를 위해 사는 세계가 아닌 “지금 여기 있음”의 세계이다. 해야 할 일, 인간관계, 역할, 목적, 심지어 이름까지도 의미를 잃는다. 존재 자체의 향기가 틈 사이로 들어온다.


칸트의 말처럼 우리는 육체 안에 있는 한 존재자의 존재 자체를 감각할 수 없다².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자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문을 아예 열 수는 없다. 그러니 코를 그 틈새에 가져다 대고 열심히 맡는 수밖에 없다. 현실의 공기는 금방 탁해지고 답답해지기 때문이다.



1. Byung-Chul Han. The Transparency Society. 2012.

2. Immanuel Kant. Critique of Pure Reason. 1781.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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