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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이구 Jun 19. 2023

호수가 보이는 도서관

누군가의 일상으로 위로받기

호수가 보이는 도서관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으로 갔다. 매주 일요일에는 꼭 이 도서관으로 온다. 호수 공원에 위치해 있는 도서관이다.


오늘 같은 날에는 진지한 철학 책보다는 소소한 소설이 보고 싶다. 책 한 권, 한 권, 뽑았다가 줄거리를 읽는다. 신중히 책을 골라야 한다. 이 책 한 권이 오늘 하루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10여분의 고민 끝에 한 권을 손에 들고 만족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내가 늘 앉는 소파는 이미 만석. 아쉽긴 하지만 새로운 자리는 또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으니 작은 실망감과 설렘을 가지고 자리를 찾아본다. 이 도서관의 한쪽 벽은 유리로 되어있다. 호수 반대 방향이어서 호수가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푸른 숲은 볼 수 있다. 사람이 적당히 없는 자리를 찾아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몇 명은 신발을 벗고 긴 의자에 편하게 눕듯이 앉아 책을 읽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색해서 정자세로 앉아, 창가에 허리를 살짝 기대고 책을 본다.


평화로운 시간이다. 마침 소설의 배경도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다. 책 속에서는 폐교의 도서관에서 사는 고양이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폐교도 아니고 고양이도 없지만, 이 상황과 꽤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책에 빠져 이야기를 보고 있는데 무심코 쳐다본 핸드폰이 전화화면으로 바뀌어있었다. 도서관에 들어오기 전에 무음으로 바꿔놓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군대 소대 후임이었던 형이 전화의 주인이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도 내 맞후임이었던 사람이 전화를 했었는데, 우연이 대단하다. 전역한 후에도 가끔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주니 나로서는 고마울 뿐이다. 군대 선임이었던 사람이 전화를 걸면 귀찮아할까 봐 내가 먼저 전화를 건 일은 없다.


자료실에서 나와 복도 끝 쪽의 통화 부스로 이동해 전화를 받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무려 37분 동안 통화를 했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최근 간 일본 여행은 어땠는지,


나보다 나이도 한 살 많은 형이지만, 이미 전역을 한 나에게 아직도 다나까 말투를 쓰고, 나의 푸념도 잘 들어준다. 전역하기 한 달 전부터 이제 말 편하게 하라고 했는데 계속 쓰던 말투를 바꾸는 것이 더 불편하다며 계속 거부를 해왔다.


37분 동안 6월의 통화부스 안에 있다 보니, 어느새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져서, 급하게 전화를 마무리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자료실 안으로 돌아왔다.


도서관에는 여러 사람이 있다. ‘자원봉사자’ 목걸이를 매고 돌아다니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가 돌아다니다가 적절한 자리에 능숙하게 신발을 벗고 앉아 핸드폰을 바라본다.(여기서 적절한 자리란, 큰 기둥에 자신의 농땡이 치는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자리를 말한다.)


또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은 창가 자리에서 노트북을 켜고 앉아 열심히 주식차트를 바라보고 있다. 주말이어서 장은 아직 열리지 않았을 텐데, 재테크 공부를 하는 걸까? 꽤 오랜 시간 동안 주식 차트를 들여다보며 나로선 알 수 없는 것을 열심히 분석하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 4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아버지, 사서와 대화를 하는 사람들. 마냥 엄숙하고 조용할 도서관 분위기에 사람 냄새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나는 도서관이 이래서 좋다. 독서실이나 스터디 카페 같은 곳은 너무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라 나와는 맞지 않는다. 사람들의 휴식을 위해 만들진 공간, 그런 공간이 나는 좋다.


1시간 정도 지나자 ‘자원봉사자’ 여자는 신발을 신발을 신고 목적지가 정해진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그 후 몇 분 지나지 않아 헤드폰을 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좋은 자리를 찾는 눈빛을 하며 돌아다니던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그 자리가 아는 사람만 아는 명당인 듯싶다. 남자는 헤드폰을 벗고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리둥절한 듯한 눈빛에,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띠고 가만히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 모습이 왠지 부러워 나도 읽던 책을 덮고 생각에 빠지기로 했다. 처음에는 ‘무슨 생각을 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나도 책 주인공처럼 서점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와 같은 MBTI의 N다운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생각에 빠져있던 남자는 어느새 사라졌다. ‘내가 헛것을 본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내 옆에는 방금 한 커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엉덩이를 그들과 반대방향으로 끌고 갔다. 여자는 신발도 벗고 창가에 기대어 자유로운 모습으로 책을 읽었다. 머리에는 회색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독서를 하는데 그 모습이 ‘주말의 여유’라는 단어를 의인화한 모습 같았다.


남자는 노트북을 꺼내 열심히 타이핑을 친다. 무언가 공부를 하는 듯 옆에 두꺼운 책을 펼쳐 놓고 책의 내용을 열심히 받아 적고 있다. 그 내용이 뭔지 궁금했지만 몰래 쳐다보는 건 사생활 침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책에 집중했다.


그 둘은 이따금 속닥속닥 얘기를 하고 작은 소리로 웃기도 했다. 그 모습이 독서에 방해가 된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그 장면까지 소설의 한 장면 같아 마치 또 다른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심 부럽기도 했다.


책을 읽다가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았다. 시곗바늘이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입대 전 갑자기 시계가 가지고 싶어져, 알바를 하며 모은 돈으로 산 시계이다. 관리도 제대로 안 하고 요즘은 자주 차지도 않는 시계이지만, 이런 주인에게도 열심히, 그리고 꽤 정확히 시간을 알려주는 고마운 시계이다.


도서관을 나와 자전거를 묶어놓은 곳으로 걸어갔다. 7시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대낮처럼 밝다. 초여름의 애매한 후덥지근함이 얇은 셔츠를 통해 느껴진다.


분수대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아이보다 더 신나 보이는 아빠, 돗자리에 앉아 선글라스를 끼고 물놀이를 하는 아이와 아빠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는 엄마, 돗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고 무릎을 치면서 깔깔 웃는 대학생, 진지하게 킥보드 경주를 펼치는 초등학생, 벤치에 앉아 대화를 하는 노부부까지, 모두가 주말을 즐긴다.


다른 사람의 일상을 바라보면 힐링이 된다. 이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동지들이다. 막막한 세상이지만 '나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어요'의 모습을 보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어쩌면 이것이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의 소설을 보는 이유가 아닐까?


일주일 동안 수고 했으니 오늘은 쉬는 날이다. 하늘에 계신 님께서도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했다. 신이 보증해 주는 쉬는 날.


그날, 초여름의 햇빛을 눈부신 반짝임으로 환영하는 호수를 바라보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완벽한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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