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가 어떻게 탄생했을지에 대한 논쟁은 비교적 최근에야 시작됐다. 다윈 이전의 시대에서는 전능한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계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면, 사막에서 자연적으로 시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 당연히 지적 존재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비유로 정교하게 설계된 이 대자연과 우주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물리법칙과 대자연의 순환, 우주의 움직임은 마치 지적 존재가 설계한 것처럼 딱 맞아떨어진다. 수학 수식으로 이러한 요소들을 표현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정교한 세계도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진화론과 빅뱅 우주 탄생론이 있다. 당연히 이러한 이론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그저 놀림거리에 불과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그 당시 기초적인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2000년 대까지는 학교 과학 교과서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두 가지를 같이 소개했지만, 이제는 진화론만이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조론은 교과서에 등장시킬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이 세상은 어떻게 탄생했나요?’라고 물으면 반 이상은 빅뱅이론으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한 때는 창조론이 상식이었지만, 이제는 진화론이 상식이 되었다. 이 다음은 뭘까?
‘창조론과 진화론 중 어떤 걸 믿어?’라는 질문에 창조론이라고 대답하면, 겉으로는 존중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반 미친놈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다. 그만큼 이제는 진화론과 빅뱅이론이 기본적인 상식이 되었다.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요소는 우리가 세계관을 형성할 때 어마무시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관은 개인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누구는 올바른 세계관으로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가 하면, 누구는 잘못된 세계관으로인해 세상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긴다.
몇 년 전 누군가 나에게 창조론을 믿으냐, 진화론을 믿으냐 물었을 때, 난 평소 내가 생각하던 나만의 세계관을 알려주었다. ‘난 이 세상이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의 답변처럼 들릴 것이다. 어쩌면 반미친놈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정말로 이렇게 믿는다. 그리고 이 믿음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상관없다. 이 순간을 위해 우주가 움직였을 수도, 신이 준비한 계획일 수도 있다.다만 나와 같은 가치관을 지닌 쪽은 아무래도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에 가깝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 세계관은 우리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창조론의 가장 중요한 맹점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가 아니라, 이 세계가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말은 즉슨, 이 세상이 70 억인용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한 1인용이라는 것이다. 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의미를 잃는다. 어떻게 보면 중2병스러운 망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다. 이 세상은 내가 태어났을 때 같이 태어났으며 내가 죽으면 이 세상도 끝이 난다. 내가 죽은 뒤에도 이 세상이 존립할지 그 누가 증명해주겠는가? 이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하는 내가 존재해야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상상해보자. 죽음을 상상해보자. 눈을 감고 아무런 사고도, 감각도, 인식도 하지 않은 상태를 상상해보자. 자, 그 상상 속에서 이 세상이 의미가 있었는가? 아니 이 세상이 존재하기는 했는가?
만일 이 세상이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믿음을 사실로 바꿀 수만 있다면, 인생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내가 되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밤하늘의 별들은 나를 위해 빛나고, 들판의 꽃들은 나를 위해 피어나는 것이다. 그 믿음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높은 자존감이 이러한 믿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믿음이 높은 자존감을 만드는 것이다. 이 전에 자존감에 대한 글을 썼을 때 언급했듯, 자존감은 의미라는 기반에서 목표라는 기둥이 세워지고, 그 위에 성취감이라는 지붕이 올려질 때 만들어진다. ‘이 세상이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의미를 찾기 가장 쉬운 환경이다.
유물론적 세계관은 우주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처럼 외롭다.
저 별도, 저 꽃도, 나에게 닥친 시련도,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모두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심지어는 지구의 자전, 우주의 움직임조차 의미를 가지게 된다. 유물론의 세상은 너무 외롭다. 우리는 우주를 떠다니는 먼지 위에 기생하는 70억 명의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죽음은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이렇다 할 공적도 세우지 못했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속에 점점 늙어갈 뿐이다.
하지만 이 글을 본 당신은 조금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선택권이 생겼다. 그 세상은 당신이 주인공인 세상이다. 그 세상에서는 당신에게 의무가 주어진다. 당신의 세상을 더욱 풍성하고 넓힐 의무가 있다. 배움과 깨달음으로 그 의무를 행할 수 있다. 동화 속에서 용을 무찌르는 용사처럼 당신은 질서와 성취라는 엑스칼리버로 혼돈과 무의미라는 용을 무찌르는 용사가 된다. 그 과정에서 시련과 고난이 찾아오지만, 노래 가사처럼 당신을 죽이지 못한 시련과 고난은 당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나의 친구, 연인, 가족은 우연히 만난 사람이 아니라 신이 이어준 인연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해지는 인연들이다. 당신의 인생은 널리고 널린 70억 개의 이야기 중 하나가 아니라, 신이 특별히 사랑하고 축복한 단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어떻게 나 자신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겠는가?
인생이라는 소설에, '나'라는 주인공
여기까지 보면 마냥 머리에 꽃밭이 가득한 사람의 망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오히려 반대이다. 난 이 세상이 저주받은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잠깐은 내 편일 수 있지만 영원한 내 편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오직 내 적만 가득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거다. 거창한 일이 아니다. 내 주변 환경과 내 주변 사람에게만 좋은 영향력을 끼치면 된다. 그러면 변화된 환경이 다른 환경을, 변화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렇게 작은 물결이 큰 파도가 되어 노아의 홍수처럼 세상을 바꾸어놓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 작은 물결은 내가 만든다"라는 믿음을 견지하자.
이 세상은 1인용이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다. 그러므로 그 작은 물결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인생이라는 이야기에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는 조연이 아닌, 주체적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