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두려운 사람에게 / 위로해 주는 철학 - 명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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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억까하는 철인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안 좋은 상황이 나의 인생에 들이닥칠 때가 있다. 과거의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에 대한 인과응보로 찾아온 상황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적어도 본인이 생각했을 땐) 세상이 나를 억까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은 예를 들어, 직장에서 정말 나와는 안 맞는 동료와 상사를 만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하필 매일같이 진상이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또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대학교 과제, 기말고사, 수능, 직장 내 프로젝트 등이 될 수도 있다. 국가 경제가 안 좋아지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가 미친 듯이 오르고 어쩌다 세금폭탄을 맞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갑자기 아파질 수도 있고, 나의 사랑하는 자녀, 혹은 부모님이 큰 병을 앓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과연 우리가 원해서, 우리가 판단하고 선택해서 발생하는 상황이 얼마나 될까? 세상은 불공평하고 잔인하다. 우리를 끊임없는 고난과 역경에 던져놓고선 알아서 빠져나오도록 도움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되면 자포자기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에 불평한다. '될 대로 되라지'라며 포기하거나 아니면 큰 공포에 도망친다. 혹은 어쩌지, 어쩌지, 하며 걱정만 하다가 아무런 대책 없이 다가오는 불행에 짓밟힌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정말 생생히 묘사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는 사형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았고, 전혀 판단할 수 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이제 더는 판단의 자유도, 의지도 없음을, 모든 것이 갑자기 최종적으로 결정되었음을 불현듯 온 존재로 느끼게 되었다.
- 죄와 벌 中-
나에게도 이러한 순간이 있었다. 사실 원래가 걱정과 근심이 많은 사람이다. 밤새 걱정과 근심으로 잠 못 이룬 적도 많고 결국 불면증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증상이 몇 달간 지속되었고 결국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손톱이 검게 변하는 증상까지 시달렸다.
과거의 나의 선택을 후회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현재를 불평했으며, 이제 곧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된 것 마냥 착착 진행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다가오는 운명 앞에 우리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무기력하게 운명을 맞이할 뿐이다. 마치 날씨와 같다. 분명 아까까지는 화창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는 상황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기력하게 비를 맞고 천둥번개를 두려워할 뿐이다.
여기 두 인물을 소개한다. 한 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이다. 다른 한 명은 로마 16대 황제이자 로마의 최전성기인 팍스 로마나 시대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이 둘의 공통점을 미리 말해주자면, 둘 다 아주 지독한 운명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먼저 라스콜니코프는 아주 가난한 대학생이다. 아니 대학생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손을 뻗으면 문고리가 닳을 정도로 작은 방에서 지낸다. 그마저도 월세를 몇 달째 밀려서 당장 집에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귀한 물건들은 이미 한 노파가 운영하는 전당포에 넘긴 지 오래이다. 그마저도 심술궂은 노파는 값을 아주 후려친다. 라스콜니코프는 지독한 가난 탓에 잠시 노파를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다는 악한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역겨운 생각을 본인이 했다는 사실에 놀란다. 하지만 정말 우연히 그 노파가 재산이 아주 많다는 소문, 그 노파가 가여운 이복동생을 괴롭힌다는 소문, 그런 노파라면 죽여도 정의이지 않냐는 대화를 듣는다. 그리고 또 우연히 노파가 홀로 집에 남게 될 날짜와 시간을 알아낸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이였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정말 모든 정황들이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하도록 이끌어가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그가 노파로부터 자기 생각의 단초를 얻자마자 노파에 대한 대화를 듣게 된 걸까?...(생략) 정말로 여기엔 어떤 숙명이, 계시가 있는 것만 같았다. - 죄와 벌 中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되자마자 국가적 재난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가뭄과 홍수, 반란, 이민족의 칩입, 그리고 국민의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역병의 유행까지... 게다가 가정 내에서도 불행의 연속이다. 그가 반란을 진압하러 직접 원정을 떠나 있을 때 아내가 먼저 사망한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 중 대다수가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그 광활한 로마의 전선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과 함께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황제이다. 사실 전쟁에 황제가 직접 나가진 않아도 된다. 로마에도 뛰어난 장군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때는 로마 최전성기인 팍스 로마나 시대이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 할 사치와 향락, 그리고 쾌락에 빠져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라스콜니코프와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 둘에게 찾아온 운명은 지독하고 잔인했다. 한 명은 가난에 허덕이며 살지만 돈 많은 노파를 손쉽게 죽이고 재산을 탈취할 기회가 생긴다. 게다가 그 노파는 아주 지독하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노파를 죽이고 돈을 탈취할 수도, 혹은 양심을 지킬 수도 있다. 다른 한 명은 황제로 즉위를 했지만, 그와 동시에 수많은 국가적, 그리고 개인적인 재앙이 연속적으로 들이닥친다.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할 수도, 혹은 적당히 문제를 덮고 사치와 쾌락에 빠져 살 수도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당신은 지금껏 어떻게 해왔는가?
이 둘은 자신에게 찾아온 잔인한 운명에 대해 아주 대비되는 태도를 취한다.
그는 도끼를 완전히 꺼내 양손으로 치켜들고, 거의 정신을 놓은 듯, 거의 힘도 들이지 않고, 거의 기계적으로 노파의 머리를 도끼뿔로 내리쳤다. - 죄와 벌 中
너의 선택과 상관없이 네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들에서는 아무런 불평 없이 운명을 따름으로서 네 마음이 만족을 얻는 것보다 더 선한 것을 발견했다면 너는 네 마음과 목숨을 다해 그것을 행하여, 네가 발견한 최고의 것을 누려라. - 명상록 3권 6
라스콜니코프는 노파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쳤다. 그렇게 그는 살인자가 되었다. 마크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주어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오현제 중 한 명이 되었다.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본인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한 명은 운명에 휩쓸렸다. 다른 한 명은 운명을 받아들였다. 운명에 휩쓸린 것과 받아들인 것은 뭐가 다를까?
라스콜니코프는 과연 본인의 의지로 노파의 머리를 내리쳤을까? 소설은 라스콜니코프의 범행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거의 정신을 놓은 듯, 거의 힘도 들이지 않고, 거의 기계적으로...'라고 말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운명대로, 주어진 상황대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을 했을 뿐이다. 소나기가 내리자 온몸이 젖고 물살에 휩쓸려간 것이다. 그의 의지대로 온몸이 젖고 물살에 휩쓸려간 것이 아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기 때문에 온몸이 젖고, 또 물살에 휩쓸려간 것뿐이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어진 운명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마르쿠스는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애초에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운명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마르쿠스가 바라본 미래는 필연적이고 또한 불가지론적인 것이었다.
내가 불평하고 걱정하다고 해서 다가올 미래가 없어지지도 않고, 염려와 우려로 미래를 미리 알아보려 해도 결코 알아낼 수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해내는 것뿐이다. 반란이 일어났으면 최선을 다해 반란을 진압하고, 이민족의 칩입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막고, 가뭄과 홍수가 났다면 최선을 다해 복구를 하는 것이다. 소나기가 내리면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쓰는 것이다. 물살에 휩쓸려다면, 최대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또한 마르쿠스는 이성적인 존재와 비이성적 존재의 차이는 안 좋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성적인 존재는 고난과 역경을 통해 더욱 성장하지만 비이성적 존재는 안 좋은 상황에 맞닥뜨리면, 더욱 안 좋아질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성적인 존재가 아닌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욱 성장할 것이다. "극복을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을 수 있다. 간단하다. 주어진 상황에 집중하지 말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는데 집중하면 된다. "어떠한 순간이 오더라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된다!"라는 다짐만 있으면 된다.
오직 그 곤경들을 어떻게 선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데 전적으로 집중하라. 너는 그 곤경들을 얼마든지 선용할 수 있고, 그 곤경들은 너의 손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재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데 집중하라 - 명상록 7권 58
어떤 외적인 일로 네가 고통을 받는다면, 네게 고통을 주는 것은 그 외적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에 자신의 판단 때문이기 때문에, 너는 즉시 그 판단을 멈춤으로써 고통을 없앨 수 있다. - 명상록 8권 47
혹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생각하는 운명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는가? 먼저 마르쿠스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미래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스스로 악을 저지르는 것은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은 피할 수 없는데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다. - 명상록 7권 71
하지만 동시에 운명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운명이 우리의 삶을 방해할 순 있어도 내가 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안 좋은 상황이란, 여름의 모기와 같은 것이다. 여름에 모기에게 물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름만 되면 병적으로 두려워하거나 할 이유는 없다.
네가 그런 삶을 살아 나가는 것을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외부로부터의 어떤 방해는 있을 것이지만, 네가 선의를 가지고 정의롭고 지혜롭게 해동해 나가는 것을 방해할 자는 있을 수 없다. - 명상록 8권 32
미래를 염려하지 말라. 운명에 의해서 네가 그 미래로 가야 한다면, 너는 지금 현재에서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동일한 이성을 가지고서 미래로 가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안 좋은 상황이 찾아와도 '어떠한 상황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할' 나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운명에 휩슬린 라스콜니코프는 어떻게 되었을까?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일 그때 누군가 그의 방에 들어왔다면, 그는 곧바로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어떤 생각의 조각들과 파편들이 머릿속에 들끓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어느 하나도 붙잡을 수 없었고, 어느 하나에도 머무르지 못했다... - 죄와 벌 中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지 않은가? 그렇다. 최악의 상황에서 너덜너덜해지고 목숨만 간신히 부지하고 난 뒤, 다가올 미래를 또다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운명에 휩쓸린 자의 최후는 그다음 자신을 휩쓸어갈 운명을 병적으로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뿐이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성장을 할 뿐이다. 물론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겠지만, 이러나저러나 고통스러운 것은 똑같다. 그렇다면 이를 기회로 더 높이 성장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운명을 바꾸는 힘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 운명을 바꿀 순 없다. 내게 주어진 상황은 절대 바꿀 수 없다. 어제 죽었던 사람이 오늘 되살아 날 수 없고, 어제 날 싫어하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날 좋아할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웠다. 바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 최선의 것을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나의 성장의 재료로 만들어낼 수 있다. 최악의 운명을 긍정적인 결과물로 바꿀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운명을 바꾸는 힘이지 않겠는가?
사실 이 글은 두 번째 글이다. 무슨 말이냐면 글을 다 쓰고 마지막 사진을 넣고 하이라이트를 하는 도중 오류가 발생해서 글이 전부 날아갔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류가 났을 땐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 내가 어떤 내용의 글을 쓰고 있는지 깨닫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자료조사도 조금 더 자세히 했다. 결론적으론 첫 번째 글보단 더 나은 글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나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운명은 말 그대로 운명, 내가 바꿀 수 없다. 어떠한 상황이 나에게 찾아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자'라는 다짐하고는 놀랍게도 미래에 대한 걱정근심이 싹 사라졌다. 어쩌면 조금 차갑고 지나치게 이성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러한 철학은 스토아학파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사람은 스토아학파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운명에 대한 철학이 당신의 하루를 위로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