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아닌 전야에 집중하기
왜 우린 행복하지 못할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우린 어떻게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질문은 아마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질문이 아닐까? 수 천년 간 얼마나 많은 철학자, 사상가, 몽상가, 성인, 종교 지도자들이 이 질문에 고뇌하고 답해왔을까?
그럼에도 정확한 답변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은 정말 절망스럽다. 수 천년 간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행복이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이 우리가 행복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라는 뜻일 테니 말이다.
우리는 찰나에 행복하고, 즐거워할 순 있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과 고통은 찰나의 순간을 제외한 모든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찰나의 순간에도 곧 다가올 외로움과 고통을 두려워한다. 누군가는 이를 잊어버리기 위해 술에 취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찰나의 행복의 순간에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실존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가 있다. 키르케고르는 다가오는 불행에 늘 두려움에 떠는 인생을 살았다. 키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 생각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자식들이 모두 33살 이전에 죽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자식들에게도 말을 했는지 키르케고르 자신도 본인이 33살 이전에 죽을 것이라고 믿었다. 더군다나 7명의 자녀 중 5명이 어린 나이에 죽자, 이 믿음은 확신으로 커졌다.
어느 순간에도 저주받은 자신의 운명 때문에 평안하지 못했다. 남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까지 했지만 모든 일이 마치 폭풍이 오기 전날 밤으로 느껴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키르케고르의 '일기'에 의하면 키르케고르는 늘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국 파혼까지 했다.
행복의 가장 큰 요소는 인간관계라고 본인이 말했으면서도 모순적이게 일기에서는 '나는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밝혔고, 파혼한 상대를 잊지 못해 끝까지 그리워하며 집착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어쩌면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가 아닌 어째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는가? 에 대한 답변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이유가 폭풍전야에서 현재의 전야가 아닌 다가오는 폭풍에 집중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가오는 위험에 대처를 해야 무사히 폭풍을 넘길 수도 있겠다마는 그만큼 똑같이 중요한 것이 나에게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 시간을 낭비하거나 다가올 폭풍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즐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이미 여러 번 많은 글을 통해 밝혔지만, 걱정과 근심이 많은 사람이다. 밤마다 다가오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에 잠을 못 이루는 일도 많다. 스트레스성 불면증과 피부병까지 걸려 얼굴을 포함한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온 적도 있었다.
그래서 철학책을 읽었다. 철학자들과 성인들이 말하는 평안함과 삶의 지혜, 행복의 근원 등을 알아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과거의 천재들의 사고의 1%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배운 성인들과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 과거에서 배운 교훈만을 간직하여 현재에 적용시키면 된다. 미래는 우리가 전혀 알 수가 없다. 완벽한 대응도 회피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일 올 폭풍을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그 폭풍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남은 건 현재뿐이다. 현재에 문제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해 문제를 고쳐야 하고, 현재가 평안하다면 최선을 다해 평안을 즐겨야 한다. 폭풍이 또다시, 반드시 언젠가 찾아오겠지만 그전까지는 폭풍전야를 누리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