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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담 Sep 06. 2023

빌런을 대하는 자세

착하게 보이면 물어뜯기 십상이다.


회사에는 여러 빌런이 있다.

꼰대 기질이 다분한 빌런, 몇 년이 지나도 일 적응 못하는 빌런, 벽과 대화하는 것처럼 앞뒤가 꽉 막힌 빌런, 사고는 지가 쳐놓고 남 탓하는 빌런, 직급 달아도 신입에게 물어보는 빌런. 그 외에도 이곳에는 많은 빌런이 존재했다. 100여 명이 훨씬 넘는 회사이니 당연한 건가?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드물다.


빌런의 소굴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는 나도, 사실은 빌런 중에 하나다. 아마 내게 붙는 수식어는 이러지 않을까? 뒤끝이 태평양보다 넓고 깊은 빌런, 일은 잘하는데 팀장한테 인사 안 하는 선택적 빌런, 잘 어울리는 사람 아니면 차갑게 말하는 싸가지 밥 말아먹은 빌런, 매번 자리 바꿔 달라는 빌런. 더 심한 말도 있겠지만 대표적인 게 이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10년 넘게 직장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흑화한 케이스였고, 이 회사에서 착하게 보이면 물어뜯기 십상이었기에 이기적으로 변한 거다.


빌런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변화가 필요했다. 변화는 했지만 완전한 빌런이 되기에는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해 준 빌런이 있다. 자칭 INFJ 킬러라고 불리는 이 빌런은 대략, 2년 전에 만난 직원이었다. 그때는 나도 신입이었고 그 빌런도 신입이었던 시절로, 입사 두 달 차였나 그랬을 거다. 직원이 혼자 다니는 걸 싫어하고 또 뭉쳐 있는 것도 싫어했던 팀장은 신입인 내게 킬러 빌런을 붙여주었다. 그 당시 나는 혼자 다니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는 직원이 있었다. 그런데도 사이를 벌려 킬러 빌런을 앉혔다.


팀장의 행동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이후에도 신입인 내게 새로운 신입을 붙이는 만행을 벌였고, 경력자에게 붙이라는 의견을 줘도 무시했다. 중고 신입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킬러 빌런의 레이더망에 내가 걸려버린 것이다. 나는 MBTI를 재미로 보지 신뢰하지 않는다. 솔직히 정확한 테스트도 아니지 않나? INFJ였다가 INTJ로 바뀌었는데, 무엇이 되어도 정확히 맞지 않았다. 그래서 별자리 같이 재미로 대화를 했데, 아뿔싸. 킬러 빌런은 MBTI를 신봉하는 추종자였다. 자칭답게 INFJ를 유별나게 좋아했다.


킬러 빌런의 집착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자신의 배우자도 INFJ라며, 배우자와 나를 동일시하려 했고, INFJ 킬러라는 점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런데다 자기를 홀로 두고 다른 직원과 카페를 갔다며 무척 서운하다고 눈물까지 보였다. 입사한 지 5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서운해서 울고 있는 빌런을 보며 나는 얼굴을 구겼다. 미안한 마음보다 섬뜩함이 들었다. 안타까움보다 숨 막히는 답답함이 들었다. 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경고음이 세차게 들렸다.


하지만 킬러 빌런은 바로 옆자리여서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의사를 밝혔다. INFJ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배우자와 나는 다르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한 달 넘게 고민한 끝에 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팀장은 자리를 바꿔주며 거리를 둘 수 있게 줬다. 하지만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킬러 빌런은 나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남자를 밝히는 여직원이란 소문을 냈다. 나와 친한 직원에게 이간질을 했다. 소문낸 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내 앞에서는 한없이 착한 사람처럼 웃었다.


이렇게 나오는데 그냥 둘 수 없지 않나. 와전된 소문을 내는 이유가 너무 약해 보여서 더 명확하게 만들어줬다. 뒤에서 말 잘하는 킬러 빌런을 대신해 나는 앞에서 싸가지를 보여줬다. 빌런을 상대하려면 나도 빌런이 되면 된다. 굳이 저 사람이 아니어도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은 곁에 남아 있으니까. 와전된 소문을 듣고 열받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니 빌런은 빌런 식으로 화답해 주자. 그게 빌런을 대하는 나의 자세이다.


오늘도 빌런 소굴에서 업무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어떤 빌런이 하루를 장식할까? 빌런의 활약을 기대하며 덤덤하게 키보드를 두들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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