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2016) 신이여, 이제 어디로 가나이까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 영화의 예고편, 포스터, 중심적인 몇몇 이미지만으로도 영화 전체를 본듯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 있는데,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가 특히 그랬다.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그것을 보았을때 '아, 역시'하며 흘러나온 탄식(어머. 내 예지력이 상승했나봐). 유려한 롱테이크와 트래블링으로 유희하는 듯 허공을 휘젓고 다니는 카메라, 미국 역사에 뿌리깊게 내리려는 듯 그려진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남성들의 드라마, 이 모든 문제들을 사소하게 만드는 거창한 주제의식(한 인터뷰에서 이냐리투는 <레버넌트>가 죽고나서 다시 탄생하는 것에 대한 영화로, 죽음에 이르게 되면 현실의 삶을 다시 생각할 것이란 주제를 다룬 것이라 했다)속에서 이냐리투만이 주는, 거부할 수 없었던 특유의 쾌감이 있긴 있다.
굳이 미뤄왔던 <레버넌트>에 현혹된건 '자연광', 매일 2시간 자연 조명 아래서 촬영했다는 사실이었다. 개고생 했다던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보다 더 고생했을 모든 스텝들, 감독의 난감함, 예상가능한 상황들의 결과로 어떤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가 나왔을까? 하는 호기심이 있었다. (어떤 스텝은 극한의 추위로 촬영하다말고 도망가버렸다고 어디선가 주워듣기도….) <버드맨>(2014), <그래비티>(2013, 알폰소쿠아론)의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와 작업한 이냐리투는 촬영에 있어서 세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시간 순으로, 인공 조명없이 오직 자연광과 모닥불을 이용하며, '버드맨'과 같은 롱숏으로 촬영하는 것. 그 결과 제작기간은 몇배로 늘어나고 예산 역시 두배로 뛰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종 제작비는 1억 3500만 달러(한화로 약 1580억원)에 달했다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이야기는 1800년대 초, 야생으로 남아있던 미지의 땅 아메리카 '와일드웨스트(wild west)'를 배경으로 한다. 모두가 아는, 이 시기는 원주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서부를 개척했던 미국의 건국시기이다. 개척시기 모험가들은 산사람(mountain man)이란 낭만적 가면을 쓰고 인디언 원주민들의 터전을 불태우고 그들을 학살했다. 야만을 탓하며 야만을 행했던 모피 사냥꾼들은 유럽의 모피 수요가 치솟았던 탓에 가죽파는 일에 전념했다고 한다. 비버가죽 무역으로 미국 경제는 호황기를 맞았는데, 모피를 두고 벌이는 경쟁으로 사냥꾼들과 원주민 간 전투가 벌어질 정도였다고. 휴 글래스는 1823년 앤드류 헨리 대위가 이끄는 미주리강 탐사대에 합류한 인물로 이 실화의 주인공이다. 회색 곰에게 습격 당하고 동료들에게 버려진 후, 먼 거리를 홀로 기어 생환한 휴 글래스의 이야기는 당시에도 크게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휴 글래스를 연기한 배우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서구인의 외모를 한 휴 글래스는 원주민 사이에서 낳은 아들 '호크'를 데리고 다니는 아버지이다. 동료들은 그런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몰살당한 원주민 부족과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그의 과거를 캐묻고, 원주민 외모를 한 아들에게 '잡종', '짐승은 짐승이다'라며 모멸섞인 언사를 던진다. 이에 흥분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저들은 네 말을 듣지 않는다, 유령처럼 살아야한다'며 머리채를 붙잡고 화를 낸다. 그가 그렇게 화는 내는건 피부색만 보는 동료들 사이에서 유색인종인 아들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 글래스가 돌연 사고를 당한다. 광폭한 회색 곰을 만나 온 몸으로 맞서 싸운 것이다. 이 곰은 총에 맞아도 쓰러지지않는 괴물과도 같은 힘으로 그를 짓밟는다. 마치 인격이라도 있는 듯, 이 회색 곰은 자신을 쏜 글래스의 두번째 총탄에 더욱 격분하여 글래스를 물고 그의 살을 찢어발겨 흔들어놓는다. 제새끼를 지키려 온 힘을 다해 죽이려드는 집채만한 곰을 누가 당해낼 수 있을까. 글래스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으스러진 몸으로 동료들에게 발견되고, 결국 버려지게 된다. 동료 '피츠레럴드'에게 아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휴 글래스의 생환과정과 피츠제럴드를 향한 복수로 채워진 영화의 서사적 전개와는 별개로, <레버넌트>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경험을 준다. 익스트림 로우 앵글로 잡은 대자연의 짓누를 듯한 장엄함, 거대한 물길과 하늘 높이 솟은 거목들, 강한 콘트라스트에서 두드러지는 뜨거운 피, 하이앵글 숏으로 비춰진 작고 나약한 인간의 몸짓은 즉각적으로 '대자연에 대적하는 인간'이란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 장면들을 이어붙이기 위한 봉합의 도구로 보이는 '대자연'의 풍광은 이냐리투의 전작 <버드맨>(2014)에서 '밤의 어둠이 아침으로 바뀌던 창밖 하늘장면'의 도구적 성격을 상기시킨다. 핸드헬트의 사실감이나 리얼한 액션, 자유롭고 유려한 카메라의 무브먼트는 대자연의 풍경과는 별개로 탐닉하게끔 만드는 구석이 있는데, 그것은 <사울의 아들>(2015)에서 느꼈던 윤리적 갈등을 소환한다. <사울의 아들>(2016, 라즐로네메스)에서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의 1인칭 시점으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시종일관 흔들리며 실제 홀로코스트 현장을 활보하고 다니는 듯한 불편함을 준다. 주인공 '사울'이 랍비를 찾는다는 일념으로 헤집고다니는 수용소의 끔찍한 풍경 속에서 인간은 거의 고깃덩이의 사체로 전시된다. 사울은 그것들을 보지 않고 스친다. 뿌연 실루엣으로 프레임 한켠에 전시된 수용자들의 죽음을, 나는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싶지만 보지 못한다. 그래서 보고싶다는 욕망에 시달려 답답해한다. 장막을 거두고 속시원히 보고싶다. 그래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도록 유혹하는 1인칭 시점의 카메라에 뭔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이와 유사하게 <레버넌트>의 의심스러움은 인물을 따라 트래킹하다가 돌연 자신만의 목적이라도 있다는 냥 방향을 틀어 다른 이를 팔로우하던 카메라에서 시작되었다. 동물과 원주민이 학살되고 삶의 터전이 불타는 처참한 광경을 미국인도, 원주민의 시점도 아닌 어떤 다른 시점이 있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이다.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카메라의 무브먼트로부터 어떠한 감정이입도 없는 시점을 허락받았을 때, 역사적 참혹함은 그저 백그라운드로 전락하고 만다. 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처참한 장면을 다시 돌려,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던 나의 욕망은 모두 이 카메라 탓이다(내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고ㅋㅋㅋ).
모든 사태로부터 초월한 카메라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들여다보고, 침투해보고, 이곳 사정부터 저곳 사정까지 유령처럼 활보하며 글래스의 위기를 아무리 성실히 그려내도 결국 그것은 나와 무관한 일이다. 추위로 성애가 끼거나 핏방울이 튄 카메라 렌즈가 죽음으로부터 우릴 지켜주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관객은 잔인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중립이란 환상을 유지하면서 스크린에 비친 모든 것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흔해빠진 복수극을 굳이 서부 개척시기에 해야할 필요는 이 장엄한 '백그라운드'를 즐기기 위함이다. 긴 러닝타임 외에 어떤 지루함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고난에 처한 동료를 버리고, 그의 눈 앞에서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인 피츠제럴드는 숨바꼭질 끝에 결국 글래스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겨우 복수하려고 살아돌아온거냐, 그럼 즐겨라, 그런다고 아들이 살아돌아오지 않아'라고. 복수란 일념 하에 초인적 의지로 살아돌아온 글래스에게 '겨우 복수'라니. 인간의 탐욕 앞에 바쳐진 자연이란 제물에 자신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글래스 역시 피츠제럴드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탐욕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서구인, 모험이란 낭만의 탈을 쓴 약탈자들의 모습. 그래서 피츠제럴드는 그에게 '너는 나와 다른 인간이냐'고 묻는 것이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피츠제럴드를 바라보던 글래스는 그를 죽이려다 '복수는 내 손에 달린 일이 아니야, 신의 일이지'라며 그를 강물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강물은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그의 몸뚱이를 흘려보낸다. 자연의 복수는 죽음으로 죄를 덮고 씻어내는 것이다.
남은 질문, 그래서 글래스는 피츠제럴드와 다른 인물인가? 이 질문에 글래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보던 전지전능한 카메라에게 질문한다. '신(카메라)이시여, 이제 어디로 가나이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