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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맘 May 18. 2021

불행은 비교에서 시작된다.

- 하지만 불행의 키재기는 내 눈높이만큼만 가능하다. -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 잡아야 한다.
잡고 보면 하늘에서 퍼진 노을 속에서 빛이 보인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내 인생의 행과 불행을 저울질했다. 옆의 직장동료를 보면서 왜 이리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 사내아이 둘을 키우면서 어느 날은 머리도 감지 못하고 옷깃은 꾸깃꾸깃하고 더럽지만 그냥 입고 나갔다. 회사 건물을 들어서는 순간 화사한 화장으로 웃음을 띠며,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뽀쪽 구두를 신은 워킹맘을 보았을 때 난 초라함의 극치를 맛보았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커피를 든 그녀 손에서 향긋한 커피 내음을 맡기도 전에 손톱에 칠해진 알록달록 색깔의 네일 아트를 보고 있으려니, 내가 여기를 잘 못 찾아온 것 같은 현기증이 들 정도였다. 그래 난 그녀보다 분명 불행했다. 하나하나 다지고 들어가서 살펴보니, 난 권투링 위에 올라가기도 전에 백기를 들었다.


이맘때쯤이다. 아이들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 아이는 알레르기 천식이 있어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돌도 안 지난 둘째도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난 아는 상식 범위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밤부터 새벽까지 불침번을 서가며 동분서주했지만 갈수록 아이가 심해졌다. 둘째는 말을 하지 못하기에 가까운 내과로 데려갔더니, 숨을 잘 쉬지 않는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날로 응급실로 가서 입원을 시켰다. 독감 바이러스로 인한 합병증이 나타난 것이다. 어린이 병동 3층 302호에 입원을 시켰다. 그런데 첫째도 기침이 심해서 도저히 안 되어 친정엄마가 응급실로 데리고 왔다. 반나절 차이로 첫째도 같은 병원 같은 호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302호 두 개 침실에 두 아이가 나란히 누웠다. 난 그날로 휴가를 내고 아이들 곁에 있게 되었다. 바쁜 엄마 때문에 아이들 면역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벌어진 일이라며 나를 자책했다. 4살인 첫째, 돌 되기 한 달 남은 둘째. 둘을 돌보면서 난 불행의 그림자를 내 온몸으로 가득 안고 병실 복도를 걸어 다녔다. 이렇게 불행한 엄마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난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말이다. 간호사가 문진 올 때마다 “어머, 여기가 바로 형제들이 입원한 병실이구나”. 이미 간호사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못난 엄마의 심정으로 나를 자책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그 와중에도 둘째 모유 수유하는 것을 가상하게 생각하여 칭찬하는 한 마디에 난 못난 어미의 자질을 만회하기 위해 가슴을 드러내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도 했다. 


간호사가 독감 바이러스가 어떤 종류인지 알기 위해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두 아이를 데리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들어간 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엄청 아픈가 보다. 난 첫째 아이의 귀를 막았다. 그리고 첫째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우리 차례였다. 예상대로 긴 줄을 콧구멍으로 넣더니 목 안까지 내려가는 태세였다. 첫째가 운다. 잠시 후 긴 줄이 나오고, 둘째에게 그 줄을 넣는다. 둘째는 ‘앙’ 울다 만다. 주사 맞는 거보다 더 힘든 작업이 있었음을 알게 된 후 더 몸서리가 쳐졌다. ‘빨리 나가는 수밖에 없지’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나오는 순간 어떤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다. “끝났나 봐요.” 그 엄마의 말에 “예, 방금 끝났어요. 생각보다 아이들이 힘들어해요.” 그렇게 이야기하자 “전 이게 세 번째여요.” 그 말에 한 아이가 세 번이나 아파서 왔으면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되묻자 “아니, 첫째, 둘째, 셋째가 한 주 걸려 이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했어요. 전 벌써 여기 온 지 3주가 되어 가요. 정말이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버티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다시 우리 병실로 돌아오면서 내 불행은 그 엄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불행의 크기는 항상 내 기준으로만 보았을 때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렇게 퇴원한 아이들은 병원에 대한 아픈 기억 없이 고맙게도 하루하루 성장하였다.


옆 동 엄마가 매일 출근을 하는 듯 보였다. 어느 날 가는 길 불러서 물었다. “아, 준호 엄마, 한 달 전부터 법률회사에 사무직으로 취업했어요.” 분명 아이를 위해서 취업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기억나 “아, 그럼 정수는 누가 돌봐 주는데.”라고 묻자, 시어머니가 아예 집에 데리고 가서 등교부터 저녁밥까지 먹이고 보낸다고 한다. 난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 내 가슴은 서늘해졌다. 난 돌봐주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돌봄 아주머니를 맞이한 지 근 5년이 되어가고 있다. 아침마다 아이들 밥해놓고 대충 치우고 나서야 돌봄 아주머니를 맞이해야 겨우 출근을 할 수 있는 내 처지가 바닥에 떨어진 낙엽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복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에 만원인 마을버스 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았다. 내 불행의 자가 다시 머릿속에 가득히 들이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엄마와 손잡고 가는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나도 우리 큰아이 손 잡고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싶은데, 그마저도 해주지 못하는 나의 처지가 또 비교되면서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눈을 연신 닦으면서 직장으로 향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손주를 잘 돌봐주겠다고 흔쾌하게 약속했던 시어머니는 점차 자기의 사생활이 없어지자 며느리에게 직장을 그만두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아지지 않고 냉랭한 채 서로 왕래도 끊었다는 말을 다른 엄마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나니 왜 위안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인 게 분명한 것 같다. 다음번에 만나면 차 한 잔 하면서 위로를 해주겠다는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의 배포가 나오는 것도 우습기까지 하다. 



어느 해 오월 연휴가 연달아 있었다. 에어로빅을 배우면서 마음 충전을 열심히 하던 중에 연휴 기간 동안 몸을 바닥에 누이고 한가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배가 불록하게 나오길래 연휴 동안 너무 먹어서 그런 줄 알았다. 컴퓨터를 많이 해서 손목 관절이 아파서 한의원에 방문했다. 배에 혹이 만져지는 거 같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명동에 있는 큰 병원에 검사한 결과 자궁내막증에 의한 혹이 10cm가 넘는다고 했다. 몸에 칼을 대는 것이 너무 싫어 여러 가지 정보를 검색하다 강남에서 비수술 치료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방문했다. 약물요법으로 혹을 녹여서 시술할 수 있다고 했다. 1차 시술 후 집에 누워있는데 너무 아팠다. 그런데 이 시술을 1차에 끝낼 수 없고 2-3회 더 해야 한다는 의사 말을 듣고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수술하기로 하고 큰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담당 의사가 나를 혼냈다. 돌팔이의 말을 듣고 그런 시술을 받은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수술로 혹이 오히려 내장에 달라붙어 떼어내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입원을 하고 주사 바늘을 꼽기도 힘든 나의 팔에 여기저기 구멍을 내며 난 수술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내 수술은 담당 의사가 하다가 내과 의사가 긴급하게 다시 내려와 수술하는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그렇게 배에 긴 수술 자국을 남기고 퇴원한 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동네 엄마들이 자주 모이는 가게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를 하다 수술 이야기가 나왔다. 수술 횟수에 따라 일병부터 장군까지 서열을 매기게 되었다. 그런데 장군이 나왔다.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갑상선 수술, 자궁 혹 수술, 무릎관절 수술, 손목 인대 수술, 맹장 수술, 라섹 수술 그리고 최근에는 담낭 수술까지. 이야기를 듣다 다들 수술 횟수가 올라가면 그분을 향해 대단하다며 박수까지 보내고 있었다. 난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난 수술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난 수술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내가 한 수술은 수술도 아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양파 까듯이 까 보니 그 안에 엄청난 내력의 소유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내 불행의 자가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힘들 때마다 보이지 않는 이 자는 내 평생 따라다닐게 분명하다. 잘 나가는 동기를 볼 때 축하보다는 시기 질투심이 일어나고, 나보다 가방끈이 짧은 또래 여성이 대우받고 큰 집에서 여유 있게 사는 것을 보면 하늘의 저주를 생각하며, 나보다 똑똑하지 않는 사람들이 먼저 승진하고 금빛 명함을 내밀 때마다 세상의 불공평을 생각하는 나로서는 내 불행의 자를 감사의 자로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거 같다. 더 이상 불행의 자는 나를 지탱할 힘이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를 더 채찍질하고 달리게 만들어 병원으로 직행하게 만드는 힘을 난 바꾸고 싶다. 그래서 오늘 불행의 자 대신 익숙하지 않은 감사의 자를 꺼내 조용히 가을 하늘에 그려본다. 오늘도 거기에 있어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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