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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맘 Apr 30. 2021

아이의 아픔으로 무너지는 날..

- 그렇게서라도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


꽃망울을 품고 있는 나무 숲을 지나간다. 

작은 꽃망울일 때는 몰랐는데, 화사하게 꽃망울이 터질 때 가지는 어떻게 그 무게를 견뎌낼까 의문이 들었다. 


어디로 도망쳐 갈 곳도 없는 나무에 비해 난 걸어 다닐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모르는 가시에 찔려 존재의 아픔으로 힘겨울 때마다 말라가는 산나무를 생각한다. 


비틀어지고 작아지는 나무조차도 하얀 눈꽃을 맞으며 그 해를 살아낸다는 게 신기하다.     

아이가 아프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크다. 


오늘 아침 담임 전화를 받고 보니, 내가 견뎌낸 시간들이 모래 한 줌 쥐었다가 빠져나가듯이 그렇게 허망하게 느껴지는 하루이다. 


최근 근처 ’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있으나, 부모가 바뀌기 전에는 달라지지 않음을 알기에 죄책감이 커진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했나 반성하게 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강좌도 듣고, 공부도 하고 했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는 종이 조각을 쥐고 올라오는 서러움에 복받친다.     


어제는 체육시간에 교복을 입고 갔다고 한다. 

체육선생님이 교복을 입은 아이에게 욕설 같은 말로 훈계를 하자, 아이가 어쩔 줄 모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왜 체육시간에 체육복만 입어야 하냐 “고 되물었다고 한다. 체육 선생님은 놀래서 담임에게 상담을 한 것 같다.      


아이 상담사가 이야기한다. 어머님이 오셔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진전이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새로운 부서 이동으로 업무가 많아 가기 힘들다고 하니, “어머님 그러면 아이 치료는 더 힘들어져요”라고 딱 잘라 말한다. 남편에게 상담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러 가려고 반차를 냈다고 하니, 자기도 가겠다고 한다.     


뭔가 일이 벌어져야 수습하고 동분서주하는 남편의 모양새는 매양 같다. 하긴 몇 년을 살아오면서 익숙해질 만도 하는데, 새로움을 기대하는 내가 더 신기할 때도 있다. 


아이가 여리고 속으로 꾹 참는 습관이 있어서 자기 의견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자기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아이의 간절함이 상담사를 찾게 한 이유였다.      


상담사를 만났다. 아이가 기질적으로 정서적 개방성이 떨어진 데다가, 부모와의 스킨십을 통해 상호작용 훈련이 잘 되지 않아,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적절하게 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 남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니 섞이지 못한다고 한다. 지능은 우수한데, 감정 표현은 미숙하여 간극이 크다 보니 본인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고 한다. 

상담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슴이 칼로 난도질하는 것처럼 아찔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난 똑똑한 아이로 키우는데 정신을 쏟고 가장 중요한 토대인 정서적인 지능은 키워주지 못한 못난 엄마였다. 더구나 남편과의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지 못하는 아둔한 엄마였다.  


남편하고 싸우고 서로 원수처럼 대하고 보니 잃은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였다.      

   

지난주에는 종합심리검사를 받으러 마포역에 있는 심리센터를 방문했다. 

아이가 2시간 30분 동안 심리 검사할 때  밖에서 부모 양육태도 검사 등을 받았다. 

문장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벌 받는 사람처럼 움찔했다. 솔직히 말해 찔렸다.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주고, 표현하게 기회를 주지 못한 바보였다. 


직장맘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자부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운 하루였다. 남편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 자신이 문제였다. 내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미숙하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고 보니 다른 사람을 더 흔들고 때리고 미워했던 것이다.      

울었다. 

흐르는 눈물이 바닥에 떨어진 벚꽃잎처럼 그렇게 떨어져 나갔다. 


처음에는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야”라고 하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얼마나 똥고집에 남의 탓을 하는 미성숙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난 너무 어리숙하고 옹졸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항상 내 안의 숨은 아이를 인정하지 않고 나이를 먹어간 것이다. 


하루하루 큰아이의 기분을 보면서 난 가슴으로 울었다. 남편과의 이혼을 꺼내기 전에 나 자신을 온전하게 보지 못하면 평생 숙제를 꺼내지 못하고 한탄하며 죽어가는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나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있다. 

삶은 그런가 보다.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을 보듬어야 함을 알게 되는 것 같다. ’ 이혼‘이 먼저가 아니라 내 안의 상처와’ 결별‘이 먼저다.


나 자신의 못난 부분을 먼저 껴안고 사랑하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이의 아픔은 나에게 주어진 성찰의 기회였다.

이 또한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보려는 연습을 조금씩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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