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린 경쟁자에서 쉼터 동지로 바뀌었다 -
<멍때리는 토끼 삽화>
토끼는 헐레벌떡 뛰어갔다.
멀지 않은 언덕에서 거북이를 환호하는 소리가 귀속을 파고들어 심장까지 스며들었다. 바람에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을 잡고 승리의 브이를 그리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거북이가 보였다. 햇살 아래 거북이의 미소는 승리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미소였다.
달리기 경주를 지켜보던 동물들은 풀이 죽어 귀를 늘어뜨린 토끼의 존재를 양파껍질 버리듯 무시하고 스쳐지나 거북이 주변을 에워 쌓고 환호했다.
“웬일이야, 거북이가 승리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세상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연습을 열심히 했나 봐요.”
“역시 재능보다는 일만 시간 노력의 법칙이 진리네요.”
“나도 오늘부터 열심히 운동해야지.”라며 다짐하듯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한편 토끼에 대해 말하는 것도 들렸다.
“재봐, 재능있다고 우리에게 자랑하더니 꼴좋네. 역시 겸손해야지”
“아니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지? 분명 전날 승리를 확신하고 밤새 술 마신 거 아니야. 봐 눈알이 빨갛게 충혈되잖아!”
“아휴, 토끼 가문에 먹칠하다니, 내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어.”라며 분개하는 친구도 있었다.
“언제는 하얀색에 빨간 눈이라 개성 있다며 칭찬하더니…….그리고 내가 언제 자랑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기들이 달리는 내 모습을 보고 동네방네 떠벌이더니……” 토끼는 울분을 말하고 싶었지만 꿈 참았다.
이래저래 토끼는 패배한 자의 저주를 자기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코를 박듯이 걸으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못했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다면 울음을 터트리고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다.
이제 곁에 아무도 없다.
온 동네엔 “새로운 스타 탄생, 거북이는 역사를 만들었습니다.”라는 홍보 현수막과 포스터가 도배되었다. 연일 방송에서는 거북이의 탄생부터 승리 배경까지 분석하는 다큐멘터리까지 방영되고 있었다.
심지어 거북이도 인정한 ‘불기만 하면 하늘로 날 수 있는 풍선껌’, ‘거북이도 먹다 놀래서 다시 찾는 ’먹어봐’ 음료수, 이거 하나면 달리기 속도가 놀랄 만큼 증진된다는 ‘스태미너 강화 생수’까지 거북이 얼굴이 안 나오는 광고가 없을 정도였다.
거북이가 부끄러워하며 낮은 저음으로 느릿느릿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신세대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겸손하게 어필하는 대화법으로 칭송받기까지 하였다. 거북이의 모든 행동과 말은 이제 사람들에게는 배워야 할 상식으로 통하게 되었다.
토끼는 식탁 위에 당근 수프가 식어가도 혼자 넋을 놓고 앉아 있곤 했다. 가끔 이웃집 다람쥐가 와서 토끼가 혹시나 이상한 마음을 먹지 않았나 하고 살피곤 했지만, 몇 번 오더니, 안심했는지 그마저도 발길을 끊었다. 밖에 나갈 때는 다른 친구들 눈을 피해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하고 다녔다. 하지만 예리한 눈빛을 가진 여우한테 들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잠을 잘 수가 없다. 새벽 별을 세워보기도 하고 당근도 세워보았다. 어떤 때는 밤새도록 좋은 명상음악도 들어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간신히 잠이 들어도, 주변 소리에 깨곤 했다. 어쩌다 지저귀는 종달새의 소리도 “야, 너 창피하지도 않니?. 나 같으면 동굴 속에 숨어 지내겠다”라고 들렸다. 아예 귀를 반으로 접은 후 풀잎으로 꽁꽁 싸매고 다닌 적도 있었다.
하루는 토끼 스스로 토끼가 맞는지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털도 빠지고 체중도 빠졌다. 눈가는 처지고 심지어 다크서클은 코밑까지 내려왔다. 너무 힘도 빠지고 기력도 없어서 어느 날인가 종일 바위에 앉아 있었다. 뭔가를 보고 멍하니 앉아 있는 토끼를 보고 다른 동물들이 오히려 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토끼 눈앞에 손을 들어 보여도 반응이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토끼가 실성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친구들은 곧 죽을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토끼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이 조금씩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 생각들을 선명하게 멀리 쳐다볼수록 작아지고, 주변 소리가 더 크게 감지되었다. 새소리,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 등 그동안 들리지 않던 소리도 점차 선명해지면서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신비한 체험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숨 쉬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벅차 눈물이 나오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니 자신이 그날 대회에서 너무 자만했었다. 만약 승리했다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동물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자신의 몸동작이나 호흡 소리 그리고 주변 자연에서 나오는 소리를 의식하는 공간이 넓어짐을 느꼈다. 이젠 다른 동물들과 눈이 마주쳐도 피하거나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미소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짝 웃는 모습이었으나 갈수록 환한 미소로 그들을 보기 시작했다.
이젠 잠도 잘 잔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토끼는 주변 모든 것들이 새롭고 하나하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가슴에서 벅찬 감동으로 물결쳐 “세상은 아름다웠네, 나만 몰랐을 뿐이네”라는 노래를 불렀다. 심지어,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이라는 주제로 시를 낭독하였다. 지나가던 동물 친구들도 토끼의 이상한 행동에 혀를 차다가도 내용을 다 듣고 나면 자기들도 모르게 박수를 보냈다.
다른 친구들도 고민이 있거나 힘들 때마다 토끼에게 상담을 받으러 왔다. 불면증으로 고민하는 올빼미에게는 너무 한 생각만 하지 말고 다른 친구들의 생각도 들어보는 기회를 가지라고 하였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며 불평하는 너구리에게는 먼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며, 지금 감사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고 말해 주었다. 살 빼는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돼지에게는 운동한 후 먹는 것을 좀 줄이면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알려주기도 하였다. 조언을 들은 친구들이 하나둘씩 효과를 보고 토끼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 소문은 거북이 귀에까지 들렸다.
거북이는 요즘 괴로웠다.
새로운 도전장이 온 것이다. 건너편 이웃 마을에 사는 하이에나가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한 것이다. 거북이와 계약을 한 소속사에서는 당연히 토끼도 이겼기 때문에 연습만 더 하면, 하이에나를 이길 수 있으며, 이번에 이기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미 허락을 한 상태였다. 사실 거북이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지난번 토끼가 자고 있을 때 토끼가 깰까 봐 옆을 지나가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자신의 실력보다는 운이 작용했음을 알고 있었다. 도전장을 받은 날부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달리기 연습을 하면 할수록 어깨가 축 처져 걸어가던 토끼의 뒷모습이 자신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차기 국회의원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마당에 하이에나와의 시합에서 지는 경우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곤 했다. 거북이는 갈수록 식욕이 떨어지고, 눈은 퀭해지고 침은 마르고 손까지 떨리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토끼의 소식을 들었다. 사실 궁금하기는 했으나, 토끼를 볼 용기가 없었다. 다시 시합하자고 하면 자신이 질 것 같아서 피했었다. 그런데 토끼가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 거북아 달리면 달릴수록 기록이 단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떨어지고 있어. 연습은 하는 거니?” 여우 매니저가 화가 나, 말을 제대로 못 했다.
“연습을 한 번도 쉰 적은 없는데…….” 거북이는 자기도 모르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열심히 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으나 여우 눈초리에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다시 연습해. 이러다 정말 다 망해. 너 때문에 우리 소속사도 망하게 생겼어.” 소속사 대표처럼 걱정하는 여우의 말에 거북이는 불 앞에 오징어처럼 쪼그라들어 연습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여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거북이는 몰래 빠져나와 토끼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
‘지친 친구들을 위한 쉼터’라고 간판이 보이는 곳에 멈추었다. 창문 너머로 토끼가 앵무새랑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토끼님, 요즘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노래를 불러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친구 꾀꼬리는 음반도 잘 팔리고, 여기저기 무대도 잘 나가는데……. 너무 부러워 연습할 마음도 안 생겨요” 앵무새가 거의 울먹이듯 말하고 있었다.
“사실 앵무새님은 꾀꼬리님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본인에게 쏟고 있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의 주특기인 고음이 자꾸 나오지 않고 밝은 소리보다는 기죽은 목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오늘부터 자기 자신을 엄마처럼 보듬어 주세요. 무슨 생각이든 내 새끼처럼 대해주세요. 해결하려고도, 피하려고 하지도 말고 그저 쓰다듬어 주고 보듬어 주세요. 위로받고 싶어 올라오는 생각들이니깐요.” 토끼의 느긋한 음성이 거북이 귀에 쏙 들어왔다.
거북이는 자세하게 듣고 싶어 창문으로 자기 목을 길쭉하게 빼서 보다가 토끼랑 눈이 마주쳤다. 순간 거북이는 목을 급하게 집어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만 달렸을 뿐 발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거북이님! 오래만이네요. 요즘 잘 지내시죠”
토끼의 상냥한 말투에 거북이는 더 얼어 버렸다.
“여기는 어떤 일로 오셨는지요?” 토끼가 묻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지나가다 간판 문구가 마음에 들어서 왔어요.”
“전 여기 쉼터 주인이 토끼님인 줄 몰랐네요. 행복한 모습을 보니 부러워요.” 거북이는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울먹이고 있었다. 눈가는 눈물로 번져 얼굴을 타고 내릴 기세였다. 토끼가 어느새 와서 거북이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사실 토끼도 하이에나와의 시합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걱정이 되긴 했다. 자신처럼 그렇게 거북이도 같은 경험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여기 오신 분들은 다 제 친구랍니다. ”
거북이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속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계약한 소속사는 자신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여기저기 상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위대한 자서전도 발표하고 국회의원 출마까지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의지로 사는 게 아니라 소속사의 상품으로 살고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며, 곧 있을 하이에나와 시합 이후 자신의 인생은 끝날 것이라고 고개를 저으며 울먹거렸다.
토끼는 잠시 생각하다 거북이와의 시합 이후 자신이 지내온 삶을 담담하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제야 자유로워졌으며, 살아있는 게 감사하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거북이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얼마나 공감하면서 살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토끼의 말에 위로가 되었다. 앞으로 계속 가려고만 하면 에너지는 바닥을 보이지만, 한 번만 뒤로 물러서면 인생은 더 풍요롭게 그려질 수 있음을 토끼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하이에나와의 시합 날이 되었다.
이웃 마을 하이에나는 버스까지 동원해서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방송사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연일 방송하고 있었다. 하이에나는 이미 승리자의 자세로 관중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본 거북이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토끼와의 만남 이후 달리기 연습을 꾸준하게 했지만,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달리기 경주가 시작되자, 하이에나는 압도적인 속도로 앞서더니 우승지점에 여유롭게 먼저 들어왔다. 처음부터 거북이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관중의 눈에서 거북이는 사라졌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하이에나는 아이돌 스타처럼 열광적인 자세와 태도로 관중을 흥분시켰다. 다들 준비된 스타라고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칭송했다.
이제 거북이는 그들의 기억에 사라졌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결승점에 도착한 거북이를 보는 관중은 없었다. 거북이는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오히려 모든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평온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지켜보던 토끼 쪽으로 걸어가면서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보았다. 토끼가 운영하는 쉼터에서 함께 일하며, 방황하거나 지친 친구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그려만 보아도 벅찼다. 관중이 열광하는 승리보다는 친구와 함께 일하는 기쁨에서 더 행복해짐을 느꼈다. 이젠 달리기 경주 승리자였던 거북이는 없지만, 친구들의 문제를 공감하고 해결해주는 거북이는 있을 것이다.
그날 토끼네 쉼터에는 조촐한 환영파티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