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감정을 인정하지 못할 때 -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그럴 때면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쳐다보다, 곧 폭풍이 올 거라는 짐작이 간다.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냥 지켜보아야 하는데, 동분서주하면서 비를 맞지 않겠다고 소리 질러가며 구원을 요청할 때가 있다. 사실 사람들은 내 안의 먹구름에 대해 말을 해도 관심이 없다. 그걸 알면서도 소리 지르면서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 이야기를 들을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절망적일 때가 있다.
막상 내 이야기를 들을 줄 사람을 만났다 하더라도, 속으로는 나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리란 보장도 없을뿐더러, 나에게 해주는 조언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 사람의 경험과 사유체계에서 나온 조언은 나랑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해되나 가슴에서 일렁이는 파장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뭔가 붙잡고 싶다. 특히 감정의 물결이 거세게 몰려오면, 어릴 때 엄마가 어린 나를 두고 장에 갔을 때 혼자 있는 느낌과 비슷하다. 나 혼자 무엇을 할지 막막함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체불명 소리에 민감해지면서 긴장되는 상태 그리고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할지 심심함 등이 겹쳐 있는 복잡한 감정의 상태 말이다. 이런 감정들이 보내는 파장을 어쩌지 못하고 거기에 휩쓸리 때마다 더 힘들어진다.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감정이 있을 때, 인정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을 이것저것 시도하다 알게 되었다. 이틀 전 억새 축제가 되면 사람들로 붐비는 하늘 공원을 다녀왔다. 미래 계획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지고, 내 몸에서 보내는 이상 신호 때문에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오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런 감정상태가 되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고, 그런 사람을 찾게 된다. 하지만 혼자 움직이는 방법을 택했다. 한강으로 난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의 출렁임의 정도가 낮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시작한 걸음이 하늘공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억새 축제때면 인산인해를 이루던 공원의 모습은 휑했다. 억새풀이 다 잘려 넓은 갈색 평지만 보였다. 하얀 은색 깃털로 가득 찼을 때는 넓은 평지로 보였는데, 오늘에야 크기를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구석구석 걸어 다니면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장을 느껴보기 시작했다. 감정들이 솟구칠 때마다 어디론가 숨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습관에서 벗어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내 안의 감정과 대화를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걷다 보니, 포토존이라고 만들어 놓은 사진틀처럼 나의 감정도 그렇게 보면서 재단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내 감정을 인정하고, 다둑여 주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고 회피하려고만 했던 패턴도 보이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감정의 물결이 몸을 흔들 때마다, 피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려고 한다. 안 하던 것을 하기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함을 느낀다. 가끔 패배자처럼 질 때도 있지만, 다시 연습하면서 근육을 키우고 있다. 지금이라도 그것을 알고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을 다독이고 싶다.
우리가 슬픔에 잠겨 더 이상 삶을 견디기 힘들 때, 나무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마음을 가라앉혀라. 진정하라. 그리고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도 어렵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은 어린 아이나 하는 생각이다. 너 안에서 신이 하는 말씀을 들으면, 그런 생각들은 조용해질 것이다.
너는 너의 길이 어머니로부터, 고향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리고 하루하루가 너를 어머니에게 다시 이끌어줄 것이다.
고향은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내면에 있다.
다른 곳에는 없다.
헤르만 헤세 잠언 집 / 내가 되어가는 순간 _나무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