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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맘 Jan 15. 2021

하루 산책이 주는 의미

_ 순간에 집중하는 힘은 단순한 일상에서 온다 _

햇살이 비추는 곳마다 눈이 녹아 질퍽하다. 응달진 곳은 눈이 녹지 않아 지나가는 발마다 힘을 주게 만든다. 바람은 선뜻 불어와 아직 겨울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산등성이를 따라 내어 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햇살이 사방으로 퍼져 주변 사물들이 한층 선명해지게 한다.            


 길이라고 생각이 들면 무작정 따라 걸어본다. 앙상한 가지만 걸친 나무숲이라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때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어느 지점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지레 놀라 눈길 한 번 주고 이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길은 끊어진 듯 보여도 다른 샛길이 나온다. 


우리 삶에도 막다른 골목이라도 한 걸음 비켜 다른 각도로 보면 새로운 길이 이어짐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십 년 이상을 누비고 다녔음에도 아직도 생소한 길이 나올 때마다 설렌다. 한강으로 모이게 모든 산책로가 이어진 동네를 사랑한다. 굳은 결심이나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아도 걷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언제든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혜택 덕분에 몸의 군살이 불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또 다른 힘으로 작용한다. 

살얼음으로 깔린 물줄기의 표면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낮 햇살이 지나간 자리에는 백설기를 가를 때처럼 균열이 보인다. 아무리 얼어 물소리가 나지 않을 것 같으나, 돌 틈 사이를 뚫고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찬 바람이 아니면 봄이 온 거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시원하다. 


길게 이어진 길가에 바싹 마른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려 서로 부대끼며 내는 소리가 모닥불에 잔가지가 탈 때 나는 소리처럼 툭 터진다. 자전거 체인 소리, 저 멀리 지나가는 차 소리, 컹컹 짖는 강아지 소리, 얼음이 녹으면서 쩍 갈라지는 소리 등이 한 음으로 들린다. 방 안에서 듣던 소리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나오는 소리를 집중해서 듣다 보니, 시야가 한층 넓어지고, 감각도 예민해진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도 단순해진다. 걷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걷는 소리보다 내 발걸음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린다. 누군가 옆으로 지나갈 때마다 나무 트랙에서 울리는 진동마저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1시간쯤 지나 편의점에 들려 컵라면을 산다. 컵라면 뚜껑 덮개를 잘 못 열어 찢어진다. 뜨거운 물을 채우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 위에 올려놓는다. 라면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순간 몇 분이 몇 시간이 되는 느낌이다. 테이블 위로 같이 간 친구가 김밥을 꺼낸다. 차가운 김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기도에서 막히는 느낌이다. 컵라면 뚜껑을 열어 국물을 따라 마신다. 긴장된 몸이 풀리면서 찜찜하게 남겨진 김밥의 잔재들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옆 테이블로 ‘막걸리’ 한 병과 컵라면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어르신이 보인다. 차가운 막걸리와 따뜻한 컵라면 국물을 번갈아 먹는 모습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온다. 막걸리 한잔을 먹으면서 “아으”하는 외마디에 연이어 따뜻한 컵라면 국물이 들어감과 동시에 “캭”하는 소리를 낸다. 미련하게 차가운 김밥을 꾸역꾸역 남기지 않으려고 먹는 우리보다  허기를 채우는 모습이  현명하게 느껴진다. 


다시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선다. 오솔길처럼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걸을 때마다 나무숲 길 사이로 햇살이 언뜻 보이면서 강물 표면에 반사되는 물결 빛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비문증으로 눈앞에 투명한 지렁이를 안고 살지만, 지금은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작게 보인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발이 저절로 움직인다. 들어오는 풍경마다 아침에 세수하고 나온 어린아이 얼굴처럼 맑다. 인적이 드문 길에서 튀어나온 길고양이마저도 방금 목욕하고 나온 것처럼 깨끗하다. 누군가 먹이를 주는지 몰라도 살이 올라 있다.  길 고양이의 주인은 없지만,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인이 되는 것 같다. 먹을 거라도 줄려고 가방을 뒤져 찾았지만 없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강가를 따라 걷는다. 이렇게 걷다 보니 아까 길에서 만난 이탈리안 그레이하운드 종의 개가 우리를 쳐다보고 짖는다. 자주 산책을 나온다고 하더니, 뼈만 있는 것처럼 날렵하다. 종 자체의 특징이라고 하지만, 이 개는 이미 우리보다 많이 걸은 듯 보인다. 주인과 함께 강가에 비추는 햇살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보인다.  오늘 하루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고, 또다시 걷을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한 시간이었다. 내일 또 다른 길 위에서 무엇을 담고 올지 기대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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