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면옥에서 을지다방으로 이어지는 풀코스
청계천의 한 공구상 대표와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을지로3가역 5번 출구 앞 을지면옥. 어느덧 냉면을 먹어도 좋을 계절이다. 평양냉면은 첫 경험이라 설렜다. 지하철역 출구로 나오니 공구상가들이 즐비하다. 걷다 보니 푸른색 궁서체로 쓴 ‘을지면옥’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가게 같다. 서울의 3대 평양냉면 맛집이라고 한다.
12시도 안 됐는데 이미 입구는 장사진이다. 말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직장인들이 냉면을 먹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유명한 집이긴 한 모양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 속에 앉아 고기부터 시켰다. 이 동네 토박이인 공구상 얘기로, 이 집은 편육이 맛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였다. 쫀득쫀득한 편육에 새우젓을 올려 먹으니 일품이다. 함께 나온 무절임도 아삭아삭한 게 별미였다. 세 사람이서 편육 한 접시를 비우고, 또 한 접시를 시켰다.
쫄깃한 편육에 ‘시크릿 메뉴’ 김치 평양냉면
소주와 편육 두 접시를 비우고 이제 드디어 본 식사를 할 차례다. 공구상 대표는 “김치로 세 개 주세요”라며 주문을 한다. 평양냉면 집에 와서 김치찌개라니, 의아해하며 기다리고 있던 와중 냉면 세 그릇이 배달된다. 평양냉면의 시그니처인 맑은 국물이 아니라 빨간 국물이다. 동치미 국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메뉴판에는 없지만 이 동네 토박이들만 알고 있는 ‘시크릿 메뉴’란다.
면 위에는 고춧가루가 뿌려져 있었는데, 동행한 한 명은 여기다 고춧가루를 더 뿌려 먹었다. 처음 먹어본 평양냉면에 대한 소감은? 그동안 먹던 함흥냉면과 비교하면 좀 심심한 느낌이었다. 평양냉면은 2~3번 먹어봐야 참맛을 알게 된다고 하니 몇 번 더 먹어봐야 그 매력을 알게 될 것 같다. 올해 92세인 송해 선생은 이 집에 와서 소주 댓병은 거뜬히 비운다고 한다.
쌍화차에 날계란 띄워주는 을지다방
청계천 공구상인들에게는 점심 코스가 있다. 을지면옥에서 냉면에 편육을 즐긴 다음, 이 건물 2층에 있는 을지다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1985년 이 다방을 인수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이 공구상인들을 반겨준다. 국내 최대 공구유통사 크레텍책임의 최영수 회장도 이 가게 단골이라고 한다. 이 다방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는 쌍화차다. 대표 메뉴라니 먹기는 하겠다만, 반신반의했다. 쌍화차를 맛있게 마셔본 기억이 없어서다.
을지다방의 쌍화차는 끓이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사장님 혼자 차를 끓이고, 서빙을 하고, 계산도 했다. 기다림의 끝에 쌍화차가 나왔다. 차에는 견과류, 대추, 계피가 들었고 계란 노른자가 화룡점정을 찍었다. 노른자는 한입에 먹어도 좋고, 퍼트린 다음 차와 함께 먹어도 좋다. 노른자를 풀어먹으면 좋을 것 같아 휘휘 저어서 티스푼으로 한 수저를 떴다. 와, 솔직히 말해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쌍화차와 완전히 달랐다. 고소하면서도 달콤하고, 걸쭉한 식감도 마음에 들었다. 차가 아니라 요리 같았다.
이 다방은 매스컴을 꽤 많이 탔다고 한다. 그럴만했다. 1980년대 다방의 모습을 간직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다 쌍화차는 고작 4000원밖에 안 했다. 이제 사장님은 인터뷰 사절이란다. 한번 매스컴을 타고나면 손님이 한꺼번에 몰려 감당이 안 된다고 한다. 꾸준히 장사가 잘 되면 직원을 뽑겠지만, 미디어를 통해 손님이 몰리는 시즌은 정해져 있다. 그것만 보고 사람을 채용하자니 인건비 부담이 크다. 그래서 인터뷰 대신 조용히 쌍화차만 마시고 왔는데, 이 글을 보고 또 손님이 많아지진 않을런지 걱정이다.
글ㅣ이혜원 기자(won@i-d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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