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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① K 형님

[권병태의 노가다 일기]

일용직으로 일하면 그날 어디로 배정받을지 모르고 새벽에 인력사무소에 갑니다. 요즘은 강동구청 리모델링 공사 현장에 자주 나갔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사는 노원구 인력사무소에서 일해왔지만, 12월 말 친구의 소개로 강동구 쪽 인력사무소에 일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현장에서 저와 가장 많이 일한 사람은 K 형님입니다. 저보다 2살 많은 53세십니다. 젊었을 때 친척뻘 되는 사람이 운영하는 중소기업도 오래 다녔고, 작은 식당을 차린 적도 있다고 하고, 1년 전까지는 오토바이 퀵서비스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K 형님은 제가 만난 수많은 현장 사람들 중 가장 독특해 소개를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일을 요령 피우지 않고 아주 열심히 합니다. 현장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묵묵히 열심히 하는 편이긴 합니다. 현장 일을 하면서 쓰는 힘을 1~10까지 놓고 봤을 때 5 정도의 강도로 꾸준히 합니다. 반면 K 형님은 8의 강도로 계속 일합니다. 저는 마대자루에 담긴 폐기물을 가벼운 것은 두 개, 무거운 것은 한 개를 나릅니다. 반면 K 형님은 가벼운 것은 세 개 이상, 무거운 것도 두 개씩 나릅니다.

공사현장에서의 모습. (사진=권병태씨 제공)

하루는 건물 외벽과 바닥 사이에 타설해 놓은 콘크리트가 얼지 않도록 천막으로 둘러싸는 작업을 했습니다. 바깥쪽 작업은 쉬웠지만, 건물 밑으로 들어가서 묶는 작업은 자세도 안 나오고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막 이음새가 뜯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묶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K 형님은 아주 꼼꼼하게도 묶어 놓았더군요.


그리고 본인은 담배를 안 피우면서 저보고는 일이 한 매듭만 지어지면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쉬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같이 잠시 쉬다가 이내 주변 정리 같은 걸 합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고 담배를 피우라고 하고선 얼마 안 있어 일을 시작하니 같이 일하던 사람이 “그러면 우리가 눈치 보인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떨어져있는 자재 활용… 회사 물건 자기 것처럼 아끼는 주인의식


여기까지는 현장에서 그래도 볼 수 있는 사람 유형입니다. 그런데 K 형님의 특이한 점은 주인의식입니다. 건물 공사를 할 때 외벽에 쇠로 된 비계(=아시바)를 설치하고 그물처럼 생긴 안전망으로 감싸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때 ‘결속선’이라는 얇은 철사로 안전망을 봉에 묶는데, 새 결속선으로 묶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형님은 새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바닥에서 헌 결속선이 발견되면 그걸 주워서 사용하는 겁니다. 이전 현장 사람들이 버려두고 간 것들이죠. 결속선은 현장에 널브러져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현장 일한 지 오래되었는데, 새 결속선이 있으면서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 쓰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K 형님은 작업 지시 전에 할 일을 예상하고 공구도 준비해 놓고, 일을 예측해서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런 바람에 아파트 건설현장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현장 직영직원이 K 형님에게 “용역에서 나온 사람 중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 다들 시간만 때우고 가려 하는데 유별나다. 그렇게 나서서 일을 하면 (작업 지시하는) 나는 뭐가 되느냐”는 식의 핀잔을 준 것이었습니다. 말이 핀잔이지 그 직영 직원이 말하는 스타일이 거칠고 잔소리가 심해서 일하는 내내 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K 형님과 가끔 정치 얘기 나누면 저와 생각이 많이 다르기는 합니다. 지면의 특성상 구체적인 예를 들 수는 없지만 삼성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공판 있던 날 “우리 경제를 위해서 재벌 회장들 감방에 보내면 안 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관점 차이는 그 사람을 판단하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K 형님을 보면서 새삼 느낍니다. 저는 K 형님이 좋습니다.


늦잠으로 지각했는데도 “아침밥 먹고 오라”며 배려

며칠 전 제가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아 현장 도착 시간인 6시 35분이 지나서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K 형님 전화를 받고 깨 7시 20분 넘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K 형님은 인력사무소나 현장소장에게 말을 하지 않고, 요령껏 잘 해주셔서 들키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 시작하고 난 후 아침밥을 못 먹은 저를 위해 현장 옆 식당에서 몰래 먹고 오라고 해서 먹고 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루 일당을 벌게 해 준 고마운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나중에 작은 기업이라도 차린다면 K 형님은 채용하고 싶습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강동구 인근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분이 있다면 적정한 보수로 K 형님을 쓰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굳이 감독하지 않아도 쉬지 않고 자기 일을 할 것이고, 회사 물건을 자기 것처럼 아낄 것이며, 안 시킨 일도 회사에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현장에서 잔소리를 했던 직영반장도 K 형님이 안 보이자 다른 동료들에게 왜 안 나오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 놓고선 속으로는 형님이 예뻐보였던 모양입니다.


겨울철에는 추위 때문에 공치는 날이 많아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게 귀한 일이다.


K 형님은 관리자 스타일은 아닙니다. 둘이서 일할 때가 아니라 여럿이서 일할 때 같이 일하던 31살 동료도 K 형님은 직원들 데리고 일하라고 하면 아마 일 시켜 놓고 남들 쉬엄쉬엄하라고 하면서 일은 자기가 다 할 거라고 웃으면서 얘기 나눈 적도 있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강추위로 강동구청 같은 관공서의 실외 공사는 중단되었는지 3일째 K 형님을 못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4시 58분에 전화벨이 울려 깨보니 K 형님이었습니다. 일을 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형님 집 보일러가 추위로 터져서 수리하느라고 일을 못 나가니 저보고 대신 나가달라는 전화였습니다.


형님 사정을 생각하면 나가고 싶었지만 오늘 낮에 할 일이 있어 못 나간다고 했습니다. 형님은 인력사무소에 연락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새벽에 전화 한 것이 예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수도 있지만, 추위 때문에 공치는 일용직이 많은 요즘 저에게 일할 기회를 준 것이고 저로서는 고마운 전화입니다.) 형님 집 보일러 수리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형님 같은 분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권병태 필자 소개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박사까지 마친 고학력 현장노동자. 국회 보좌관, 사회디자인연구소 연구원, 학원 강사 등을 거쳐 건설현장에 둥지를 틀었다. 휴식 시간에도 책을 놓지 않는 열독가, 매일 작업일지를 쓰는 글쟁이, 5천명의 친구들과 소통하는 페북스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세레나데를 부르는 로맨티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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