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기운’이 모이길 염원하며 지었던 ‘세운상가’라는 이름이 고성장 산업화 시대의 허세만은 아니었던 듯 하다. 세운상가 한 켠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던 이정성 장인은 어느 날 찾아 온 백남준 작가를 만난 순간부터 20여 년 간 그와 함께 전 세계를 누볐으니 말이다.
다양한 매체에서 그를 인터뷰 해왔지만, 많은 경우 ‘백남준 전담 엔지니어’의 입을 통해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오늘은 백남준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기술인의 관점에서 이정성 장인을 만나봤다.
처음 기술의 세계에 들어온 순간을 떠올려 본다면.
코흘리개적 얘기다. 1963년 서울에 올라왔다. 을지로2가 국제TV학원에서 텔레비전, 라디오 이론과 조립을 배웠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차서욱 국제TV학원 원장님과 장종선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기술을 배워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주신 분들이다.
직접 땜질해서 만든 기계에서 소리가 나던 순간만큼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때만큼 기분 좋은 순간이 없었다. 물론 요즘은 더 놀랄만한 일이 많지만, 내가 만든 라디오와 전축이 꽝꽝 소리를 낼 때의 희열만 못하다.
항상 곁에 두고 쓰는 장비는 어떤 것이 있나.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다. 전자는 미약한 신호라 테스터로 재서는 모른다. 오실로스코프를 이용해 전기 파형을 눈으로 보고 전파가 잘 들어오고 있는지, 출력이 어디쯤 끊어졌는지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뒤가 길어서 두 손으로 끌어안아야 했지만 이제는 달랑달랑 손가락에 걸고 다녀도 될 정도로 작아졌다.
초기에 사용하던 장비와 요즘 제품을 비교해본다면.
테스터는 모양만 바뀌었지 기능은 예전에 사용했던 군용 장비와 똑같다. 당시 통신기계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쓰던 것을 들여온 거였다. 지금은 1만5000원이면 사지만 옛날에는 크기도 크고 비쌌다. 6개월치 월급으로도 사기 힘들었다.
각종 장비의 변천사를 초기부터 지금까지 쭉 지켜봐왔다고 할 수 있는데, 정말 놀랄 때가 있다. 1986년 오사카 국제박람회장을 갔을 때 전시장 꾸미는 일본인들이 허리 춤에 뭔갈 차고 있어 보니 드릴이었다. 전깃줄도 안 달린 드릴을 왜 가져가나 했더니만, 웽웽거리며 작동하더라.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 공구가 일을 다 하는 것 같다. 예전에 드릴이 없던 시절엔 손으로 돌려서 철판에 구멍 뚫고 그랬는데.(웃음)
국산 전동공구 약하고 정밀도 떨어져…일본 야금술에 못 미쳐
디월트는 모터 잘 타고, 보쉬는 겉돌고, 계양은 배터리 아쉬워
드릴 중에는 어떤 제품을 선호하는가.
디월트는 힘이 세서 좋지만 비싸고, 모터가 잘 탄다. 보쉬는 무는 힘이 약해 겉돌 때가 있다. 뚫고 나가지 못하고 끼어버린다. 최근 홈쇼핑에서 본 스위스밀리터리 드릴은 축의 센터가 맞지 않아 멀리서 보면 씰룩씰룩 하더라. 처음 촉을 댄 지점에서 쉽게 벗어나 버린다.
계양의 가장 큰 약점은 배터리다. 힘도 약하고. 우리나라 공구의 점수를 매기자면 전체적으로 50점 미만이다. 약하고 정밀도가 떨어진다. 드릴 비트는 강하면서도 질겨야 하는데 국산은 십자 이빨이 똑 떨어져 나간다.
(드릴 세트박스를 열며) 십자 촉이 하나도 없지 않나. ‘똑’ 하고 이빨이 다 나가버렸다. 일반 십자드라이버도 아직 일본 야금술을 못 따라간다. 이빨이 나가고, 몇 번 헛돌면 십자드라이버가 들지를 않는다. 열처리 기술 부족 때문이다. 독일제도 좋지만 일제가 싸니 굳이 독일제까지 안 찾아도 된다.
미국제는 복스(박스 형태의 소켓) 세트가 좋은데 단위가 인치(inch)라 한국의 밀리미터(mm)와 맞지 않아 아쉽다.
출장을 갈 때는 어떤 장비는 가지고 가나?
해외 전시 설치는 컨테이너가 갈 때 부속을 담은 가방을 실어 보낸다. 지금도 내 공구 가방은 상하이에 가 있다. 다음달에 전시가 끝나면 운송회사를 통해 돌아온다. 요즘은 그렇게 다닌다. 무거워서기도 하지만, 보안검색이 까다로워진 탓도 있다.
상하이 같은 경우 전자시장에 가면 웬만한 것은 다 살 수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다 나쁜 것만도 아니다. 우리나라 광화문사거리 지하도 입구에는 매일 고장 나 서있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왜 멈춰서 있나 했더니 에스컬레이터의 절반이 바깥에 있어 비 맞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상하이에 가니 웬만한 육교에 올라가는 계단은 다 에스컬레이터로 해놓았다. 상하이에는 다른 비가 오나? 야외에 에스컬레이터가 널렸다. 폭우가 와도 잘만 돌아간다. 광화문 에스컬레이터는 지금도 서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를 욕한다고 하면 얼굴이 벌개진다.
세운상가에서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하다.
어떤 가게를 찾는지, 장인들 간의 교류도 많은지?
주로 부품가게를 다닌다. 서진부품이란 곳에 자주 가는데 그 외에는 간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 아는 사이다 보니 가게이름 보고 들어간 적이 없어서.(웃음) 슬리퍼 끌고 나가면 없는 것 없이 다 살 수 있다. 우리 장인회가 16명인데 월례회의도 매달 하고, 회원들이 여기저기 있으니 불쑥 들어가서 얘기고 나누고 그런다.
백남준의 작품을 유지보수할 때 가장 많이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는 무엇인가?
고압 트랜스(TR)와 콘덴서가 죽는 문제다. 오래된 텔레비전이 죽는 것은 예측불허다. 공구 가방을 미리 보내놔도 적중 확률이 별로 높지 않다. (웃음)
백남준과의 첫 작업이었던 ‘다다익선’ 설치 당시, 국내에는 없던 비디오 분배기(Divider, 하나의 신호를 여러 신호로 나누어 내보내는 장치)를 직접 개발했다. 그 후 상용화가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가?
3~4년 정도 걸린 것 같다. 내가 만든 건 하나의 입력 신호를 22개의 출력 신호로 분배해주는 것인데, 당시 하나를 넣어서 6개가 아웃되는 일제 파나소닉 제품이 500달러나 했으니, 시중 제품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 넣어서 10개가 아웃 나오는 것도 수없이 만들어서 미국에 보내고, 유럽에 보내고 그랬다. 가격은 반의 반도 안되고, 출력은 훨씬 안정되니 백 선생님은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하셨다.
백남준의 일본인 엔지니어인 슈야 아베와 한국인 엔지니어 이정성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백남준 선생이 1964년 독일에서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진공관식 텔레비전, 라디오로 작품을 만들 때 아베가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런데 1980년대를 넘어서면서 집적회로(IC)가 등장하고 텔레비전이 현대화되며 아베가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아베는 ‘하다 안되면 다른 걸로 해보면 되지’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계산기를 두들겨 딱 맞아떨어져야만 하는 성격이다. 속도전에는 맞지 않았다. 전시 개막을 한 달 남겨놨는데 돌다리만 두들기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사고가 나선 안 되겠지만, 필요할 때는 속도를 내야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일하던 시절엔 현지에서 부품을 구하기 어려우므로 여행용 가방에 별별 부속을 다 가지고 다녔다. 아베는 없이 그냥 다녔고.(웃음) 나라고 뭐 무거운 가방이 좋아서 가지고 다녔겠나.당시 내게는 생명같은 존재였다.
글 ㅣ 구회일
공고 나온 삼촌과 미대 나온 삼촌이 계십니다. 두 분의 작업실이 무척 흡사하다는 건 과연 우연일 뿐일까요. 미학이나 평론이 아닌 산업재의 관점에서 예술의 세계를 염탐해보려 합니다 :)
이런 기사는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