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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Apr 08. 2021

글 쓰는 방

매일 글을 쓰고 싶은 내가 꿈꾸는 공간

 내가 글을 쓰는 방은 커다란 창으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다락방이면 좋겠다. 이왕이면 찐한 빛을 뽐내는 노을을 볼 수 있는 서쪽으로 난 창이 있는 방이면 더 좋겠다. 아니면 지붕창이 있어도 좋겠다.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방 한쪽 구석에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추억이 가득한 물건들이 가득한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겉면에 매직으로 크게 내용물을 써놓으면 찾기 쉬울 것이다. 책상은 창 옆에 놓을 생각이다. 고개를 돌리면 창밖을 볼 수 있도록. 지붕창이 있으면 지붕창 아래에 자리 잡을 것이다. 책은 책상 맞은편 책장에 넣어서 정리하고 만약 책장을 넘친다면 바닥에 잘 쌓아놓을 것이다. 나만 알 수 있는 규칙을 가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좋아하는 전구 빛이 나오는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을 것이다. 이런 방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이가 내 옆에 있고 나는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추억 상자 속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보고 지난 일기장과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 이런 내 모습을 상상만 해도 벌써 글이 술술 써질 듯 행복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 아니 인간답게 사는 데 필요한 두 가지, 경제적 독립과 공간 독립이다. 눈을 뜨자마자 본능적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보이는 모든 것에 머릿속 글을 써 내려가는 천재라면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냥 글 쓰는 사람을 동경하는 일반인일 뿐이다. 그러니 글을 쓰려면 글 쓰는 방이 있어야 한다고 글을 쓰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따지고 있다. 사실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다 가지고 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혼자 사는 집이 있다. 그런데 왜 글 쓰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까? 처음에는 내가 생활하는 공간이 아닌 서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집은 쉬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보니 집에서는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주로 카페에 가서 일하거나 글을 썼다. 매번 카페에 가는 것도 귀찮아져서 몇 년 전 큰 맘먹고 책상을 샀는데 결국 책상은 잡동사니를 올려놓는 커다란 수납장으로 변했고 의자는 옷걸이가 됐다. 

 글을 쓰고 싶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코로나로 인해 일할 수 없게 되면서 심리적 부담감과 위축감이 커졌다. 그동안은 스스로 바빠서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쓰자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는데 지금 나에게 많은 건 시간뿐이다.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내가 과연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내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많았다. 글은 나를 너무 잘 드러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 보이기가 두렵기도 했다. 이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정말 많았고 나는 그들처럼 잘 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바쁜 와중에 일기라도 쓰고 있으니 언젠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글 쓰는 방이 생기면 글을 쓰자며 스스로 위안 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블로그 이웃 신청을 해놓은 북티크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챌린지가 눈에 띄었다. 예전부터 진행했던 프로그램인 거 같은데 이제야 내 눈에 띈 거 보면 최근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강해지긴 했나 보다. 더는 핑계 대지 않고 글을 쓰며 자존감을 높이고 자신감을 찾고 싶었다. 며칠 동안 고민을 한 후 챌린지를 신청했다. 처음엔 제이와의 일상과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과 생각들을 정리해서 쓰고 싶었다. 그런데 글쓰기 첫날부터 집 계약이 완료되고 오랜 서울 생활을 정리하게 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글로 그 마음을, 생각을 정리하게 됐다. 첫날부터 단톡방에서 만난, 얼굴도 모르는 분들에게 나의 개인적인 생활을 글로 공유함으로써 나를, 내 생각을 알리게 됐다. 나에겐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제이와의 일상을 글로 쓰긴 했지만, 책은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소설을 읽는 것보다 다른 분들이 올린 글을 읽는 게 더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새로운 생각과 다양한 시선을 많이 배웠고 인도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또 내가 어렴풋이 생각만 했던 것을 정확히 한 문장으로 표현해준 글도 만났다. 서로 격려하고 응원해주니 글을 쓰는 게 더는 두렵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은 무얼 쓰지?’라는 생각을 하며 내 하루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다채롭게 느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내 하루가 더 풍성해졌다. 그렇게 2월 한 달 동안 나에겐 글 쓰는 방이 생겼다. 물리적 공간은 아니지만, 그 방에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생각을 나누고 경험을 공유했다. 정말 소중하고 행복한 경험이다. 

 글을 쓰는 일은 “돈”이나 “자기만의 방”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자각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끈기가 더 중요하다. 내가 꿈꾸던 글을 쓰는 다락방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비록 노을을 볼 수 있는 서쪽 창은 없지만, 별을 볼 수 있는 지붕 창도 없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추억들로 가득한 상자가 내 마음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보물찾기 하듯 그 상자 하나를 열어보면 된다. 그리고 그냥 의자에 앉아 꾸준히 쓰면 된다. 나 역시 글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_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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