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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Apr 07. 2021

내가 죽을 날을 선택할 수 있다면?

영화 '완벽한 가족'

 집에서 영화를 본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3-4년간 tv 없이 살아봤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극장에 가기 귀찮거나 집에서 하루 종일 tv를 틀어놓고 멍하게 보고 싶은 날만 가끔 그리웠다. 그래서 부모님 댁이나 언니네 집에 가면 새 영화가 나왔는지 꼭 확인하는 편이다. 요즘같은 시기엔 극장에 가기도 어려우니까.

 오늘은 언니네 집에 제이와 있는 날이다. 제이가 낮잠을 자길래 tv를 켜고 새로운 영화가 나왔는지 둘러봤다. 그러다 눈에 띈 제목. 완벽한 가족. 거기에 주연 배우가 수잔 서랜든과 케이트 윈슬렛이라니. 주저없이 리모컨의 확인 버튼을 누른다.

 나는 좋아하는 특정 주제가 있다. 가족, 크리스마스, 책, 도서관, 서점, 죽음, 믿음. 문화 생활을 할 때, 특히 책이나 영화를 고를 때 이런 주제가 있다면 무조건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딱 봐도 내가 좋아하는 주제가 두 개나 들어있다. 가족과 죽음. 사실 원제는 'Black bird' 다. 사전적 의미는 단어 그대로 (유럽산) 검은새, (북미산) 찌르레기라고 한다. 솔직히 영화를 보고 나서 왜 블랙버드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오히려 '완벽한 가족'이라는 나름의 반어법(?)으로 바꾼 게 난 더 이해하기 쉬웠다.

 어느 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들뜨거나 즐거운 표정들이 아니다. 오히려 걱정되고 슬픈 표정을 감추고 있다. 이유는 엄마가 아프기 때문이다. 엄마는 한쪽 손을 못 쓰고 거동이 불편하다. 모든 걸 혼자 하려고 하지만 힘에 부쳐보인다. 더 이상 이런 모습으로 살기 싫은 그녀는 자신이 죽을 날은 선택한다. 그래서 온 가족이 모였다. 그녀가 죽기 전에 다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첫째는 완벽주의자다. 부모님의 첫째딸, 아내와 엄마 역할을 최선을 다해 완벽히 해내려고 노력한다. 변호사인 남편과 잘생긴 아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온다. 둘째는 언니와는 정반대의 성격이다. 레즈비언이고 여전히 자신이 무얼해야 할 지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파트너와 집에 온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절친한 친구가 왔다. 이들은 엄마가 죽기 전, 마지막 주말을 함께 하려고 한다. 크리스마스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고 만찬을 먹는다. 이틀간 서로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서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영화에서는 큰 사건이나 갈등이 나오지는 않는다. 죽음은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사건이니까.

 나 역시 영화를 보며 영화 자체의 스토리 라인이나 인물들의 상황을 그려내는 것이 많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죽을 날은 내가 직접 선택한다는 그 생각이 꽤나 흥미로워 끝까지 볼 수 밖에 없었다.

 영화의 끝무렵, 딸들이 엄마의 죽음을 반대하자 그녀는 내 의지로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의지와 선택.

 과연 죽음을  의지로 선택할  있을까? 책과 영화로 나온 ' 비포 ' 역시 남자 주인공이 죽음을 선택한다. 그도 다시 건강해질  없는 신체와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기에. 죽음을 기다리기 보단 선택한다. 다시는 평범해질  없는 신체적 문제가 있기에.

 영화에서처럼 내 가족이 이런 선택을 한다면 나는 어떨까?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내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언제 죽어야 후회가 남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만약 내가 죽음을 선택할 기로에 있다면 그건 신체적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문제일 거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영화 '스틸 앨리스'가 생각났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알츠하이머에 걸려 나를, 가족을, 그동안의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나는 아마 '나 자신'을 잃어가는 걸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나를 인식할 수 없어 내가 누군인지 모른다면 내가 나를 기억할 수 있을 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안락사, 존엄적 죽음은 여전히 논란이 많은 이슈다. 어느 나라에서는 합법이고 여전히 어느 곳에서는 불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음을 맞이하지만, 태어나는 것도 내 선택이 아니었듯이 죽음도 내가 선택할 수 없었다. 혹자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라는데. 죽음도 선택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과연 어디까지일까?

 짧은 영화 한 편이 꽤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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