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치영 Apr 07. 2021

부러진 나무에도 꽃은 핀다

2021. 04. 05

 나는 벚꽃이 펴야 봄이 왔다고 느낀다. 벚꽃보다 빨리 피는 꽃들도 많지만, 왠지 모르게 늘 봄이면 벚꽃이란 생각이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벚꽃 축제가 많아서 그런가? 생각해보면 개나리 축제, 진달래 축제는 별로 없다. 개나리는 벚꽃을 보러 가면 함께 피어있는 꽃이고 진달래는 산에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꽃이니까.

 래브라도 레트리버를 키우다 보면 적어도 하루에 1 산책은 필수다. 제이와 자주 가는 산책로는 집 뒷산인데 봄이 오니 여러 꽃이 피어서 산책 내내 눈이 즐겁다. 개나리, 진달래, 생강나무 꽃, 목련, 벚꽃 외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벚꽃이 많이 폈다. 엄마가 말하길 나무를 파는 사람이 벚나무를 잔뜩 심어놓고 봄이 오기 전에 나무를 판다고 했다. 덕분에 매년 봄마다 우리 눈이 즐겁다. 제이를 키우기 전에는 멀리서 눈으로만 즐겼는데, 요즘엔 산책이 필수라 꽃나무들 사이 오솔길을 매일 걷는다. 

 며칠 전 산책을 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봤다. 오르막이라 약간의 경사가 있어서 그런지 나무 기둥은 보이지 않고 마치 허공 속에 핀 듯 꽃만 무성하게 보였다. 오르막을 다 올라서 보니 무척 오래된 벚나무였다. 아주 크고 색도 진한 나무였다. 

 자세히 보니 오르막에서 본 벚꽃은 나무에서 부러진 큰 가지에서 핀 꽃이었다. 원래 있는 나무 기둥에서 핀 벚꽃은 하늘 높이 위를 향해 있었고 올라오면서 본 벚꽃은 부러진 큰 가지에서 또다시 뻗어 난 작은 가지들에서 핀 꽃이었다. 무척 풍성했고 아름다웠기에 멋진 나무 기둥을 가진 벚나무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부러진 가지가 몸통 역할을 하는 모양새였다.

 나뭇가지는 태풍에 부러졌는지 부러진 단면이 꽤 거칠었다. 아마 오래된 나무라 뿌리가 단단히 박혀있어서 뽑히지 않고 강한 바람에 맞선 면에 있는 가지가 부러진 것 같았다. 대부분 몸통에서 부러진 가지는 영양분을 공급받기가 어려워 죽기 마련인데 꽃까지 피우다니 대단한 생명력이다. 

 부러진 나무에서 핀 꽃이라. 화려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꽃을 피워낸 모습을 보니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론 애처롭게 보였다. 부러진 가지는 자기가 꽃을 피울 수 있을 줄 알았을까? 나무에서 떨어져 넘어질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듯 말라죽을 거란 두려움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을 곰곰이 살펴보니 지금 내 마음을 나무에 빗대어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올해 2월 서울에서 청주로 이사를 온 나는 두려웠다. 공연의 특성상 모든 제작은 서울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일이 갑자기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서 벗어나면 일을 찾기가 어려워질 거란 두려움이 있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코로나 때문에, 월세 때문에 버틸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그런데 부러진 나뭇가지에서도 화려하게 핀 꽃을 보니 왠지 모를 희망이 느껴졌다. 나 역시 꽃을 피울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부러진 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 이제는 누군가의 뿌리에서, 몸통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가 아니라 나만의 뿌리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뿌듯함과 책임감이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렇지, 나는 이제 제이를 책임져야지. 내 생활을, 제이의 평생을.’

 “제이야, 저 나무 좀 봐. 부러진 가지에서 꽃이 엄청나게 폈다. 예쁘지? 정말 대단하다.”라고 말하며 제이를 돌아봤지만 제이는 내 말은 못 들은 척 땅에 코를 박고 두더지 찾기에 몰두해 있다. 한 번만이라도 고개를 들어 꽃을 보길 바랐지만 내 욕심이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풍경을 좀 보려나? 제이가 처음 만나는 봄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고 싶은데. 역시 내 맘대로 안된다. 제이에겐 후각이 최고의 놀이이자 봄을 만나는 자기만의 방식인가 보다. 제이는 후각으로, 나는 시각으로 제대로 봄을 만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