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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Mar 12. 2024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첫 발걸음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05

 2022년 5월 14일

 걷기 1일 차: 생장 피에드포르 -> 보르다

 부모님과 순례길을 오르면서 했던 몇 가지 고민 중 가장 큰 고민은 과연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까였다. 순례길을 다 걸으면 당연히 좋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하루에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아빠의 심장 시술과 엄마의 무릎 수술은 두 분이 좋아하시던 등산을 그만두게 된 계기가 됐다. 그리고 시골에 살면 당연히 차를 타고 다녀서 일부러 걷는 운동을 하지 않은 이상 걸을 일이 없다. 그러니 내가 걸었던 것처럼 걷기도 어려우실 거고 하루에 걷는 양을 줄이면 유럽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데 그것도 불가능했다. 부모님은 오래 해외 생활을 하신 경험이 없으니 쉽지 않으실 터,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가 가장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내가 꼭 보여드리고 싶은 곳들 위주로 걷고 부모님이 걷기 힘든 높은 산이나 경사가 심한 내리막 구간은 패스하자였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코스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 넘어가야 할 피레네 산맥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로 바로 넘어간다. 순례 1일 차인데 순례길에서 가장 높은 산 중하나인 피레네 산맥을 넘는 코스이다. 그렇지만 육체의 고통을 경치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코스 중 하나이다. 그러나 부모님과 하루 만에 넘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피레네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중간 기점인 보르다에서 1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굳이 바욘에서 1박을 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보르다에 머무를 수 있는 일정을 맞추다 보니 프랑스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무르게 됐다. 보르다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알베르게였고, 많은 사람들이 묵는 오리손보다 대략 1km쯤 더 위에 있다. 시설도 깨끗하고 주인장의 음식 솜씨도 좋다는 평이 많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곳에 가게 된다. 며칠 전부터 생장 날씨를 유심히 살폈다. 걷는 첫날인데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날이 흐리고 오후에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예보가 있었으나 다행히 9시쯤부터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지며 해가 나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출발할 필요가 없어 조식을 먹고 적당히 호텔에서 좀 더 쉬다가 출발했다.  

<깔끔했던 조식, 손님들이 자신의 나라에 핀을 꽂아놓는 지도가 있어 우리가 대한민국에 처음 핀을 꽂았다.>
<여유롭게 시작한 순례 첫날>

  천천히 여유롭게 걷기 시작했다. 첫날이라는 설렘, 기대가 가득 느껴지는 발걸음이었다. 한국과 다른 꽃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풍경에 관한 이야기도 하며 마을을 빠져나갔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자 부모님은 조금 힘들어하셨다. 아빠는 숨이 가빠 자주 쉬어야 했고 엄마는 무릎이 걱정이었다. 물론 높이 오르는 만큼 경치는 좋아졌지만 그 경치를 즐길 기운도 없으신 게 아닌 지 걱정이 됐다.

<높이 오르는만큼 경치는 더 좋아졌다.>

 잠시 쉬면서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양갱과 초코파이의 힘을 빌렸다. 지난번에도 초코파이의 힘을 느꼈는데 양갱이 생각보다 아주 좋았다. 적당히 달콤하고 포만감도 있었다.

  잠시 쉬고 기운을 내 걷자 정말 반가운 오리손 산장이 눈앞에 보였다. 이곳에서 하루 머무는 순례자들은 벌써 짐을 풀고 여유롭게 쉬고 있었다. 잠시 신발도 벗을 수 있도록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부랴부랴 샌드위치와 음료를 시켰다. 오랜만에 야외에서 식사를 하니 마치 소풍을 온 것 같았다.

<반가웠던 오리손을 뒤로하고 보르다로 향했다.>

 조금 더 오르막을 올라가니 커다란 소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보르다였다. 보르다는 주인장 혼자 운영하는 곳이라 다른 손님을 안내할 동안 잠시 밖에서 웰컴 드링크를 마시며 지친 다리를 쉬었다.

<커다란 카우벨을 달고 있는 소들, 깔끔한 외관이 마음에 들었던 보르다>

 보르다는 공간이 크지도 않고 벌레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큰 배낭과 신발은 보관함에 두고 필요한 물건만 바구니에 담아 들어갈 수 있었다.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규칙은 규칙이니까. 부모님은 처음 경험해 볼 도미토리라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침대마다 커튼이 달려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가장 불편한 것은 역시 샤워인데 코인을 넣으면 대략 5분 정도 샤워기를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씻으며 방법을 숙지한 뒤 부모님께 사용 방법을 알려드리기로 했다.

<조명기와 콘센트, 핸드폰을 넣을 수 있는 바구니가 있어 좋았고 커튼을 치니 꽤 안락했다.>

 전쟁 같은 샤워를 마치고 저녁 시간까지 부모님은 잠시 주무셨다. 우리는 오늘 6시간을 걸었다. 내가 부모님을 상태를 정확하게 체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꽤 힘들어하셨지만 부모님 모두 무사히 이곳까지 올라오셔서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보단 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내일이 걱정이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체력도 근력도 더 좋아질 거라 믿는다. 사실 오늘과 내일 구간은 건강한 사람도 힘들어하는 구간이니까.  

 보르다에서의 저녁 식사는 아주 훌륭했다. 오늘 이곳에 묵는 사람이 모두 참여하는 식사시간이고 간단한 자기소개와 왜 이곳에 오게 됐는 지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다. 주인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했는데 순례길을 걸었고 이 길 위 어딘가에 자기 알베르게를 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곳에 보르다를 세웠다고 했다. 그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프랑스, 독일, 덴마크, 미국 등 국적이 다양한 사람이 모여 식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는 이 시간이 꽤 마음에 들었다. 벌써부터 순례자라는 동질감이 들었다.

<보르다의 저녁 식사 시간>

  식사를 마치고 주인장과 조금 더 얘기를 나눈 뒤 짧은 산책을 했다. 그리고 이번 길 위에서의 첫 노을을 만났다. 늘 기대하지 않고 만나는 건 두 배의 기쁨이 된다.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노을을 만나 기분이 정말 좋다.

<마음을 빼앗겼던 노을>

 멋진 석양이 내일 다시 걸을 힘을 주었다. 부모님께서도 힘들어하셨지만 잘 이겨내셨고 오늘 푹 쉬고 나면 내일 또다시 걸을 힘을 얻으실 것이다. 드디어 부모님과 함께 걷게 된 이 길, 첫날. 처음은 늘 새롭고 설렌다.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더 멋진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난 길과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될 이 길 위에서의 순간이 벌써부터 꽤 기대된다.


*보르다 숙소: 오리손에서 대략 1KM 내외로 떨어진 곳인데 생각보다 가깝게 붙어 있다. 당연히 새로 생겨서 시설이 좋고 깨끗하다. 나폴레옹 루트를 한 번에 넘기 힘들거나 경치를 조금 더 즐기고 싶다면 하룻밤 쉬어가는 걸 추천한다. 다만, 베드가 적고 예약이 필수이니 비행 일정이 정해졌다면 빨리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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