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치영 Mar 14. 2024

부모님 연세를 실감하던 날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07

 2022년 5월 16일

걷기 3일 차: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 론세스바예스를 나와서 숲길을 걸었다. 오늘은 마을을 자주 만나니까 지난 이틀보다는 수월할 것 같았다.

<숲깊을 빠져나가면 보이는 부르게테의 산 니콜라스 성당>
<서쪽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아침이면 내 앞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서 내 그림자를 따라 걷게 된다.>
<내가 좋아했던 사진 포인트 구간>

 이틀 산을 넘은 여파인지 부모님은 좀 힘들어하셨다. 오르막에서는 아빠가 숨 가빠하셨고 내리막에서는 엄마가 무릎을 조심하느라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우리 셋은 대략 1시간에 2KM 정도를 걷는 것 같았다. 순례길에서는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천히 걷는 건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너무 늦은 오후까지 걸으면 더위 때문에 지치고 힘들다. 여전히 스페인은 시에스타가 있기에 마을에 도착하는 시간을 잘못 맞추면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도 어렵다.

<에스피날의 산 바르톨로메 성당 앞에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

 이제야 부모님의 나이가 실감 났다. 70대에 접어든 두 분. 한국에서는 부모님과 길게 여행할 일이 많지 않았고 이렇게 매일 걷거나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몰랐다. 두 분 모두 수술도 꽤 하시고 드시는 약이 많지만(이번 여행의 작은 배낭 하나 분량은 두 분의 약으로 가득 찼다.) 건강 관리에 신경 쓰시기 때문에 괜찮으신 줄 알았다. 내 나이도 실감하기 어렵긴 하지만 부모님 연세가 직접적으로 다가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너무 부끄럽고 부모님께 죄송했다. 그동안 너무 무신경한 딸이어서.

<지난 번에 쉬었던 카페,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걸음을 옮겼다.>

 지난번에 걸으면서 쉬었던 곳들이 눈에 뜨이는데 문을 닫거나 쉬는 곳들이 있는 것 같다. 이곳 역시 코로나 때문에 많은 타격이 있었던 것 같다.

 길을 걸으며 외국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번에는 어르신들이 많은 것 같다. 대부분 우리처럼 2020년에 걷기를 계획했다가 코로나 때문에 미룬 사람들인데 더 늦기 전에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올해 왔다고 했다. 특히 보르다에서 만난 프랑스 아주머니와 독일 부부 커플은 우리 부모님이 대단하다고 말하며 늘 우리를 보면 반갑게 웃고 응원해주곤 했다.

 오늘 길을 걸으며 내가 예상치 못한 한 가지는 바로 푸드트럭이 있고 난 다음의 내리막이다. 이렇게 경사가 심했나 싶을 정도였다.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수비리 알베르게에 늦게 도착한다는 메일을 보내긴 했지만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이곳에서 내려오는 길은 한 곳이니 내가 먼저 가서 체크인을 하기로 했다. 내려가면서도 수많은 생각이 났다. 내려오다가 엄마 무릎이 아파 주저앉으시면 어떡하지? 푸드트럭에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요청할 걸 그랬나? 원래 점심을 먹기로 생각했던 곳이 문을 닫아 점심도 부실하게 먹었는데... 간식도 무거울까 내 배낭에 다 넣었는데 괜찮으시려나? 등 수많은 생각을 하며 알베르게에 도착해 빠르게 체크인을 했다. 체크인을 하고 간식을 챙겨 다시 올라가려고 하는데 마을 입구에서 부모님을 만났다. 정말 반갑고 안심이 됐다.

<알베르게 앞 냇가에서 지친 발을 잠시 담궜다.>

 부모님은 이렇게 오래 걸은 적은 처음이라며 뿌듯해하셨다. 오늘 나는 약해진 부모님과 그래도 여전히 강한 부모님을 만났다. 셋이 이곳에 와서 참 다행이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표현하지 못하는 못난 막내딸이긴 하지만.

 저녁은 생장에서처럼 슈퍼에서 장을 봐서 간단히 해 먹었다. 식당에 방명록이 있길래 우리도 글을 남겼다. 알베르게 방명록에서 한국사람이 쓴 글을 찾아 읽는 것도 꽤 재미있다. 부모님은 쉬러 들어가시고 식당에 앉아 팜플로냐 숙소를 검색하고 일기를 쓴다. 내일은 평지를 걸으니 오늘보다는 조금 낫지 않을까?

 이제 겨우 3일 차라 아직은 걷고 쉬고 도착지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이곳에서의 경험은 단순히 멋진 풍경과 성당을 보며 걷는 것만은 아니니까 부모님께도 걷는 것만이 아닌 다양한 경험을 하실 수 있도록 해봐야겠다. 세요를 직접 찍어보신다던지... 더 여유 있게 걷고 충분히 쉬면서 걷자. 간식도 많이 챙겨 다니고.

오늘 하루는 부모님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나를 이만큼 키워주셨으니 나이가 드신 게 당연한데 왜 이리 아쉽고 슬픈지... 앞으로 남은 날들은 조금 더 표현을 잘할 수 있는 딸이 되어보자라고 다짐하지만 과연 가능하려나?


*숙소 정보: 리오 리오하 알베르게.

 수비리 다리를 넘자마자 있는 알베르게. 위치도 좋고 깔끔했다. 우리는 3인실을 사용했는데 킹베드 하나가 있고 접이식 침대를 넣어주셨다. 방 앞에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도 있어서 방은 좁았지만 괜찮았다. 두 명이 묵는다면 더 쾌적하게 사용할 수 있다. 사장님은 스페인어만 가능. 요즘엔 번역기가 잘되니 상관은 없다. 깔끔한 만큼 방이 빨리 차니 예약을 하면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 눈에 피레네를 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