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08
2022년 5월 17일
걷기 4일 차: 수비리 -> 팜플로냐
오늘도 화창한 날이 이어졌다. 해가 쨍하면 오후엔 많이 더워서 걷기가 힘들긴 하지만 스페인의 쨍한 색감을 눈과 사진에 담을 수 있는 좋은 날이다.
간단히 점심을 먹으려고 했던 수리아인 바가 문을 닫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 조바심이 났다. 나는 군것질을 하거나 먹지 않아도 괜찮은데 부모님이 문제였다. 아빠는 배가 고프면 힘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급한 대로 마을 벤치에 앉아 아침에 먹고 남은 빵을 먹었다. 경험에만 의지하지 말고 좀 더 알아보고 찾아보고 왔어야 했다. 이런 것도 다 경험이지라고 생각하는 건 혼자 왔을 때의 상황이고 부모님과 같이 오면 뭔가 딱딱 맞아떨어지면 좋겠다. 좋은 것만 보시고 힘든 건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팜플로냐 도착 전 마지막 마을에서 독일에서 온 부부를 만났다. 부모님 사진만 찍는 나를 보더니 같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님 두 분 모두 대단하시다고 하며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걸어가실 수 있을 거라는 고마운 말을 전했다. 보르다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낸 인연이 길에서 만나면 반갑고 안 보이면 잘 걷고는 있을까 걱정이 된다.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다.
다리를 지나 문을 연 바에서 식사를 하고 택시를 부를까 아니면 걸어갈까 고민을 했다. 팜플로냐까지는 평지이지만 만약 그곳까지 걸어간다면 오늘은 거의 22km를 걷는 것이다. 부모님은 평지이니 천천히 걸어가 보자고 하셨다.
시에스타라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골목을 지나고 막달레나 다리를 지나 팜플로냐 성벽을 따라 걸어갔다.
프랑스 문을 지나 들어가면 팜플로냐 구시가지가 나온다. 오늘은 9시간을 걸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씻고 잠시 쉬다가 팜플로냐 대성당을 구경하러 나왔다. 호텔에는 세요가 없다고 해서 대성당에서 세요도 찍고 시가지 구경도 하려고 말이다. 팜플로냐는 작가 헤르만 헤세가 즐겨 찾았다는 카페 이루냐도 있고 핀초가 유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걸 다 즐기기엔 부모님이 피곤해하셨으므로 대성당만 관람하기.
대성당은 미사 시간이 아니면 박물관처럼 운영되고 있기에 입장료가 있다. 다만 순례자 여권이 있으면 할인이 되고 세요를 찍을 수 있다. 대성당답게 중정도 있고 볼거리가 꽤 있었다. 스페인어를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은 시간이 됐겠지만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했다. 대략 1시간 정도 둘러보고 호텔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름 대도시라 맛집은 많았지만 일찍 먹고 일찍 자려고 하는 순례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식당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도시에 왔으니 이것저것 보고 즐기고 싶었지만 오늘도 9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길에서 보낸 부모님에겐 쉽지 않았다. 순례길이니 걷고 성당을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여행도 하는 것이니까 도시에선 조금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마을에 도착해서 볼거리가 좀 있다면 중간에 택시를 타고 가는 것도 방법일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누리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건 내 욕심이니까. 나는 이 길을 한 번 걸어봤고 그만큼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도 많지만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감사한 일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먹는 것에 좀 더 신경 써보자. 내가 관심이 없어서 숙소에 비해 생각을 잘 못하는데 오늘처럼 중간에 식사를 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쓰자.
* 숙소 정보: 팜플로냐 케스트랄 호텔
호텔이지만 에어컨이 없어서 자면서 더웠다. 욕조가 있어서 좋았지만 전반적으로는 가격 대비 별로였다. 대성당과도 가깝지 않고 팜플로냐에서는 대성당 앞 사설 알베르게가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욕조가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부딪히지 않고 하룻밤을 지내고 싶다면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