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09
2022년 5월 18일
걷기 5일 차: 팜플로냐 -> 푸엔테 라 레이나
더위에 잠을 설쳐서 그런 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그리고 호텔에서 지내다 보니 알베르게처럼 다른 순례자들 준비 소리에 깨거나 그런 일도 없고 말이다. 가볍게 빵과 주스를 먹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늦게 출발하면 무더위가 금방 찾아오기 때문이다. 스페인 한낮의 더위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4년 전 5월 초에 걷기 시작한 나는 아침, 저녁 꽤 추웠는데 올해는 꽤 더운 날이 계속된다. 엄마와 내가 추위를 많이 타서 걱정했는데 오히려 더위 먹을까 걱정이 되는 날이다.
팜플로냐 시청 앞을 지나 깨끗한 도심의 돌길을 따라 걷고 대학 캠퍼스를 지나 다음 마을로 이동한다. 도시에서는 아무래도 건물이 많고 유동인구가 많아 화살표를 찾기 어렵다. 그럴 땐 구글지도나 까미노 앱을 사용해서 길을 찾으면 편하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큰 배낭을 메고 걷는 또 다른 순례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이다.
용서의 언덕을 오르기 전 마을의 어떤 집에 꽃이 예쁘게 피었다. 순례길을 5월에 오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부모님이 꽃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늘 꽃을 가꾸며 지내는 두 분이기에 가을보다는 꽃이 많이 피는 봄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꽃 사진을 진지하게 찍는 아빠와 꽃만 만나면 늘 사진을 찍는 부모님을 보니 봄에 오길 참 잘했다란 생각이 들었다.
용서의 언덕은 말 그대로 산이 아니라 언덕이지만 평지에서부터 서서히 올라가고 피레네와 다르게 돌길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난생처음 오래 걷는 걸 몸이 아직 받아들이지 않아 피로감이 쌓여있기에 꽤 힘든 코스이다. 특히나 내리막은 엄청난 돌길로 이곳에서 내려오다가 발목을 다치는 사람들도 많기에 오늘은 꼭 택시를 불러서 타야겠다고 미리 마음먹고 언덕을 천천히 오르기로 했다.
푸른 하늘과 초록의 밀밭이 걷는 내낸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언덕을 오르기 전 이곳으로 소풍이나 체험 학습을 온 듯한 학생들을 만났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터전에 매일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이곳을 걷는다는 걸 알고 있을까? 순례길 위 도시에는 곳곳에 조가비 표시와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그 의미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으려나? 생활 속에 순례길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꽤 궁금했다.
어마어마한 바람을 맞으며 장장 6시간 만에 용서의 언덕에 도착했다. 순례길 관련 책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이 조형물을 많아 보았을 것이다. 4년이 지난 후에 만났는데도 여전히 멋있었다. 이곳에 밤에 온다면 별이 가득한 걸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을의 바에서 물어본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고 차를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을 때 한 구석에서 울적해하는 외국 아주머니를 만났다. 혼자 오셨는데 이곳까지 오신 게 힘에 부친 지 벤치에 앉아 어찌할 바를 몰라하시는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진 않기에 바나나와 오렌지를 하나 건네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이곳에 사는 커플인 듯 보이는 사람 중 여자가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아마도 힘에 부치지만 계속 걸어서 가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슬프고 아쉬워하시는 것 같았다. 커플 중 여자는 아주머니와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자신들의 차에 그녀를 태우고 내려갔다.
순례길의 많은 사람들이 길을 꼭 두 발로 걸어서만 가고 싶고 배낭도 꼭 다 메고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다들 오랜 시간 염원해 온 길이고 다 걸어서 보면 좋긴 좋다. 시골은 시골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길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나 역시 온전히 배낭을 메고 걸어서 800km를 걸어봤기에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래서 부모님과 함께 오기로 마음먹었을 때 일정 및 걷는 구간을 어찌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순례길만 걷고 내 인생길은 안 걸을 수 없으니 무작정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약 한 달의 시간을 하루에 25km 내외로 걸으면 건강한 사람도 무릎이나 발목이 안 좋아진다. 평생 그만큼 걸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회복하는 시간도 꽤 걸린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오래 걷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난 이번엔 무조건 부모님 배낭은 동키로 보내고 걷는 건 좋은 코스만 걷고 어려운 코스는 건너뛰기로 맘먹었다.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고 와도 오늘 택시를 부르며 이게 과연 좋은 선택일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아주머니를 만나니 몸도 힘들면서 마음까지 힘들지는 말자고 생각하게 됐다.
약 10km의 거리를 택시를 타니 10분 내외로 도착했다. 아마 우리 걸음으로는 대략 5시간은 더 걸렸을 텐데... 우리 세 사람은 한 시간에 대략 2km 내외로 걷기 때문이다. 내리막을 편하게 내려와서 좋긴 했지만 며칠 만에 탄 대중교통은 어색하고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무리해서 걷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부모님과 나도 이 길을 즐기며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세탁을 하러 가서 내일 목적지인 에스테야와 다음 날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에 숙박을 잡으려고 하니 이미 만실이 된 곳이 많다. 확실히 예전보다 순례자들이 많아진 것 같고 코로나 이후 예약을 하며 다니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공립 알베르게들은 여전히 선착순이긴 하지만 우리 걸음으로는 공립은 힘들 것 같고 예약을 해야 길 위에서도 마음 편히 천천히 걸을 수 있기 때문에 다음 날 숙소를 미리 예약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렇게 자리가 없다니 대략 코스를 미리 짜서 며칠 씩 예약을 해야 하나? 결국 로스 아르코스는 내가 지난번에 묵었던 사립 알베르게에 베드 3개를 예약했다. 지난번에는 4인실에 3명이서 묵기도 했으니 이번에도 그런 행운이 있길 바라본다.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드렸다. 미사가 끝나고 순례자를 위해 기도를 해주시고 목걸이도 주셨다. 성당 세요도 받았고. 아마 걸어서 도착했으면 부모님은 힘드셔서 미사도 못 드렸을 것 같다. 지금처럼 걷기도 하고 힘든 코스는 적당히 점프하면서 다녀야 도착해서 성당도 보러 다닐 여유가 있을 것 같다. 오늘 처음 택시를 타서 마음이 불편했으나 저녁 미사를 보며 좋아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도 힘내자!!
* 숙소 정보: HOTEL EL CERCO
숙박앱의 평이 좋아서 선택한 곳. 3인실에 묵었는데 시설도 깨끗하고 직원분들도 친절하고 좋았다. 특히 카운터에 걸려있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