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10
2022년 5월 19일
걷기 6일 차: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테야
오늘도 화창한 날이 이어진다. 아침엔 상쾌하지만 금세 더워진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여왕의 다리로 유명한 곳인데 오늘 지나는 순례길에서 잠시만 벗어나면 멋진 아치 모양의 다리를 마주할 수 있다.
오늘도 중간에 마을을 자주 만나는 편이다. 마을이 1-2시간 내에 계속 나오면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급한 볼일도 바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힘들 때마다 잠시 쉬어갈 수 있어서 좋다. 오늘은 첫 마을인 마녜루에서 커피를 마셨다. 주로 간단히 빵과 주스로 아침을 먹고 길을 걷다가 만나는 첫 마을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우리의 일과가 됐다.
뱀의 둥지라는 뜻의 시라우키 마을로 가기 전,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포도밭을 만났다. 이렇게 작은 나무에서 포도가 열리고 와인이 만들어진다니... 가을에 오면 주렁주렁 열린 포도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4년 전, 이 마을 약국에 들어가 아픈 다리 증상을 설명하고 발목 보호대를 산 적이 있었다. 길을 걸으며 지난 까미노가 많이 생각이 나, 내가 이곳에서 겪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담담히 부모님에게 얘기를 했다. 좋은 추억들로 가득한 이 공간을 부모님과 함께 걸으니 감회가 남다르고 색다르게 다가왔다. 아마 언젠가 다시 걸을 날이 온다면 여러 겹으로 쌓인 추억으로 더 행복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보르다에서부터 인연이 닿은 독일 부부 커플을 올리브 가든에서 만났다. 늘 우리가 안 보이면 안 보여서 걱정해 주고 만나면 정말 대단하고 잘 걷고 있다고 격려해 주는 인심 좋은 부부들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인삼 사탕을 좋아한 독일 부부들. 잠시 쉬면서 올리브 나무도 구경하고 점심을 먹으러 로르카로 향했다.
로르카에는 한국인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호세네 알베르게가 있다. 다행히 한국 아주머니를 만나 믹스 샐러드와 참치 또르띠야를 먹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부모님은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 꽤 좋아하셨다. 아주머니가 얘기하기로 요즘 무척 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며 이상 기온이라고 한다. 원래 오늘의 계획은 이곳에서 택시를 불러 에스테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미 13km 정도를 걸어왔고 점심을 먹고 난 이후라 무척 더울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점심을 잘 챙겨 먹은 부모님은 더 걸을 수 있을 거 같다고 하셨고 아주머니도 이후엔 길이 험하지 않으니 충분히 걸어가실 수 있을 거라 응원해 주셨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뜨거운 한낮의 길 위로 나섰다.
그러나 곧 무더위에 우리는 지쳤고 엄마 무릎도 아파져서 간신히 에스테야 전 마을인 빌라푸에르타 바에 들려 택시를 불렀다. 마음만 앞선다고 더 걷지 말고 최근에 이상기온으로 무덥다고 하니 무더운 오후까지 걷는 일은 피해야 할 것 같다. 대략 10-12km 정도를 걷고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는 것이 무리하지 않는 선일 듯 싶다.
에스테야 숙소에 도착해 씻고 잠시 쉬다가 오늘 저녁은 주방이 잘 되어 있기에 고기를 구워 먹으려고 마트를 찾아 나섰다. 지난번에는 외곽에 있는 수련원 같은 곳에 있어서 마을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에스테야도 꽤 큰 마을이었다.
저녁으로 돼지 목살을 굽고 즉석밥과 함께 먹었다. 배부르게 저녁을 챙겨 먹고 숙소 뒤에 있는 산 미겔 성당을 보러 나갔다. 성당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꽃바구니를 들고 성당 앞에 있었다. 우리는 초 봉헌을 하고 간단히 기도를 올린 후에 나왔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곳에서는 매일 레몬맥주를 마시고 있다. 저녁 먹으면서 아빠랑도 오랜만에 한 잔 하고 벌써 감자칩과 3캔 째다. 내일은 이라체 샘을 만나는 날이다. 두 분 모두 와인을 즐기진 않으시지만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다. 순례는 고행길이 아니다. 특히 부모님에게는... 부모님 컨디션을 잘 살피며 즐기면서 걷자.
*숙소 정보: 아고라 호스텔
깨끗하고 친절하고 작지만 주방도 잘 되어 있다. 벙커 침대 4개가 한 방인데 우리가 한 방을 다 쓴다. 물론 돈은 조금 더 주지만 화장실도 딸려있고 룸 컨디션도 꽤 좋다. 혹시나 다음에도 온다면 다시 묵고 싶을 만큼 괜찮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