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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Mar 18. 2024

이 길이 주는 매력이 뭐냐 하면..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11

 2022년 5월 20일

 걷기 7일 차: 에스테야 -> 로스 아르코스

 오늘은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와인과 물을 마실 수 있는 이라체를 지나는 날이다. 와인을 좋아하진 않지만 신기한 경험을 부모님과 함께 한다고 하니 아침부터 발걸음이 가벼웠다. 

<철로 직접 만든 장신구를 파는 대장간. 예쁜 주황색 세요도 찍어주신다.>

 에스테야도 나름 큰 마을이기에 마을을 잘 빠져나가면 곧 이라체의 샘을 발견할 수 있다. 순례자들이 모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병에 담아 가기도 하고 개인 컵이 있는 사람들은 컵에 담아 조금 맛보기도 한다.  우리도 생수병에 와인을 조금 받아 맛을 본다. 아침부터 마시는 술이라니 기분이 묘하다. 

<왼쪽에선 와인이 오른쪽에선 물이 나온다.>

 이라체를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하나는 빠르지만 산을 넘어가는 것이고 다른 길은 살짝 돌아가긴 하지만 평지로 걷는 길이 있다. 지난번에도 다리가 아파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오르막이 있는 길보단 평지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갈림길을 잘 찾아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표현 그대로 내 스스로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라체의 샘을 지나고 보니 자갈로 된 얕은 오르막과 오른쪽으로 꺾는 길이 나왔다. 여기에서 가야 하나? 오른쪽으로 나가보니 차도가 나왔다. 차도를 건너갔었나?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부모님은 잠시 기다리시라고 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길을 찾았다. 주변의 외국인에게 물어봐도 다들 모르겠다는 대답뿐. 결국 부모님이 오르막도 천천히 걸어가면 괜찮으니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가보자고 하셨다. 그래서 얕은 자갈길을 따라 올라가 보니 위에서 갈림길 표시판이 나왔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아래에서 한참을 헤맨 것이다. 4년 전에 길을 걸어봤다고 너무 자만했나 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던 것이 어찌 보면 독이 것이다. 헤매는 또한 길을 일부인데 무언가 가이드처럼 딱딱 안내해야 한다는 나름의 강박이 마음속에 있었나 보다. 

<15분 여를 헤맨 끝에 발견한 갈림길 표지판>

 마음이 속상해진 나를 엄마가 몰라볼 리 없었다. 길을 찾았으니 괜찮다고 그리고 좀 헤매도 다 추억으로 남을 테니 그것도 재미라고 말씀을 하셨다. 하긴 예전에 홍콩에서 지하철 출입구를 잘못 찾아 캐리어를 끌고 이리저리 다녔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니 여행은 어쩌면 헤맴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이 길 위에서의 헤맴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고 그 헤맴 역시 이 길이 주는 매력이다. 그러다가 길을 잘못 들면 또다른 풍경을 만나게 될 것이고 어쩌면 그 길이 돌아가는 것이여도 순례길이 아닌 이 마을만이 가진 또다른 길과 매력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이러한 헤맴도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순례길의 매력이기도 하니까. 그걸 내가 너무 패키지 관광을 온 것처럼 딱딱 맞춰 해내고 싶어했는 지도 모른다. 

<헤맨 길에서 만난 신기한 나무와 멋진 풍경>

  마을을 만나 들어간 바에 사람들이 많아 음료만 사서 놀이터로 갔다. 지금은 다리가 아픈 순례자에게 아주 좋은 쉼터가 되어 주지만 아마 오후에는 아이들로 가득 찬 곳일 것이다. 

 솜사탕 같은 구름이 있어 해가 쨍하게 내리쬐진 않는다. 이런 날이 걷기에 딱 좋은 날이다. 다음 마을에 도착해 내가 처음으로 초를 봉헌했던 작은 성당에 들어가 초를 봉헌했다.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의 산 안드레스 성당>

 오늘 걷는 길의 최고점에 있는 마을이고 이제부터 서서히 내리막이다. 지금까지 대략 9.5km를 걸었다. 그리고 이 마을이 바가 있는 마지막 마을이었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했다. 해가 쨍하지도 않고 고도차가 많은 코스도 아니라 쉬엄쉬엄 걸어가 보자고 하셨다. 

<예쁜 꽃 사진을 정성드려 찍는 아빠의 작품>

 다행히도 구름이 땡볕은 막아주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었다. 예쁜 꽃들도 많이 피어 아빠는 정성스레 사진을 찍었다. 여행 오기 전에 카메라를 어떻게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화질이 좋은 최신 핸드폰으로 바꿔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선택이었다. 

 지치고 힘들 무렵 푸드트럭을 만났다. 우리가 좀 늦게 도착한 탓에 샌드위치는 다 떨어졌지만 시원한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배낭에 있던 과일과 간식거리와 함께 잠시 다리를 쉬었다. 

<로스 아르코스 도착>

 드디어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9시간 동안 22km를 걸었다. 또다시 최장 거리 기록 경신. 우리 부모님이지만 정말 대단하시다. 분명 힘드실 텐데 끝까지 해내셨다. 서둘러 알베르게로 향했고 피곤한 부모님은 씻고 얼른 쉬셨다. 다른 곳이 다 예약이 차 베드만 예약했기에 여러 사람과 방을 함께 써야 했다. 그래도 지치고 피곤한 몸을 누일 곳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코로나 때 연세가 많으신 신부님들께서도 많이 돌아가셨기에 작은 마을엔 상주하시는 신부님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이곳에도 미사가 없다고. 로스 아르코스에서는 한글로 된 순례자의 기도를 주셨어서 기대하고 왔건만 조금 아쉬웠다. 

<산타 마리아 데 로스 아르코스 성당>

 알베르게 주방도 괜찮아서 근처 슈퍼에 가서 장을 봐서 가볍게 저녁을 먹었다. 


 공용 거실에서 다음 일정과 일기를 쓰고 있는데 세르비아에서 온 레나를 만났다. 그녀는 이곳에 온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내게도 인터뷰 요청을 해서 짧은 영어로나마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2번째 이 길을 걷고 있으며 부모님과 함께 온 내게 정말 대단한 일이라며 왜 이 길이 나에게 이토록 매력적인지 알고 싶어 했다. 

 이 길은 나를 심플하게 만들어서 좋다고 대답했다. 먹고 자고 걷는 것 외에 다른 일들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심플함. 그리고 또 하나, 이 길 위에서는 전 세계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대답했다. 이 두 가지가 순례길이 나에게 주는 매력이라고. 머릿속에 갖고 있던 생각을 말로 표현하니 조금 더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머릿속을 환기시켜 주었다. 고마웠다. 


 내 인생에 먼 타국 땅에서 이처럼 동일한 공간에 다시금 방문할 일이 있을까? 4년 전 이곳에서 순례길 첫날부터 함께 걸어온 순례 친구들과 헤어졌다. 각자의 일정에 맞게 걷기 위해서였다.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을 찍었던 테이블과 독일 커플들과 이야기를 나눴던 거실, 맛있는 빵을 샀던 동네 빵집 등 수많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순례가 끝나고 늘 그리워하던 이곳을 부모님과 함께 걷는 이 순간은 내게 특별한 경험이고 소중한 순간이다.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시간. 걷기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이고 한국을 떠나온 지는 열흘 남짓이다. 오늘 밤에는 왠지 모르게 벌써부터 이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것 같다. 



* 알베르게 정보: 오스트리아 알베르게

 4년 전보다 가격은 베드 당 2유로 올랐다. 작은 방이 여러 개 있는 구조이고 방 안에 방이 있기도 하다. 계단만 있긴 하지만 주방도 괜찮고 안뜰도 좋다. 예약을 하면 마사지도 받을 수 있다. 조용하진 않지만 다른 순례자들과 교류하기 좋은 알베르게이다. 부모님과 함께 하기엔 단독방이 아니어서 조금 불편했다. 

<옛 추억이 있는 알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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