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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Mar 19. 2024

로그로뇨에서 꼭 먹어야 하는 것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12

 2022년 5월 21일

 걷기 8일 차: 로스 아르코스 -> 비아나 -> 로그로뇨

 잠귀가 밝은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의 기척에 잠을 푹 자지 못하셨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비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잤다는 것 외에도 일주일을 엄청 걸으셨으니 몸의 피로도가 상당할 것이다. 걷는 것에 익숙해지지만 피곤해지는 시기이다. 어제 사놓은 빵을 챙겨먹고 길을 나섰다. 

<붉은 양귀비 꽃이 아름다운 길>

 어제와 다르게 오전부터 더운 날이다. 한 두 송이씩 보이던 양귀비 꽃이 어느덧 만개했다. 파란 하늘과 녹색 밀밭, 누런 자갈길과 붉은 양귀비가 만들어내는 색감의 조화는 눈을 사로잡는다. 

 쭈욱 펼쳐진 길을 따라 산솔이라는 마을로 들어갔다. 늘 그렇듯 처음 만나는 마을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쉰다. 이제 오전에는 조금 속도가 올라 1시간에 3km 내외로 걷는다. 그만큼 체력이 좋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은 언덕들이 있긴 하지만 산이라고 할만한 곳은 없다는 것도 한몫하고. 

<토레스 델 리오의 산토 세풀크로 성당>

 산솔에서 멀지 않은 토레스 델 리오까지 기세좋게 도착했다. 커피를 마시며 쉰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당만 둘러보고 근처에 잠시 앉아 부모님과 비아나까지 걸어갈 지 이곳에서 더 쉬다가 택시를 부를 지 상의했다. 조금씩 체력이 좋아진 부모님은 비아나까지 가보자고 하셨다. 이곳에서부터 비아나까지 업/다운 힐이 3번 정도 나오는데 천천히 걸어가면 될 것 같았다. 오늘은 호텔을 예약했으니 알베르게에 일찍 도착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다. 

 순례자들이 쌓아놓은 돌탑이 보였다. 엄마와 나도 작은 돌멩이를 하나씩 골라 소원을 빌며 올려놓았다. 이 길을 무사히 걸을 수 있게 해주세요. 엄마는 무엇을 기도했을까?

<화살표 바위에 앉아 가져온 과일을 먹었다.>

 언덕에 오르면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었고 내리막은 지그재그로 천천히 내려왔다. 천천히 걸으며 아빠의 카메라 렌즈로 꽃들을 더 자세히 만날 수 있었다. 내 인생에 이렇게 자세히 꽃을 본 적이 있었을까? 아빠가 찍어서 보여주는 꽃들은 정말 예뻤다. 

 정오의 쨍한 햇살과 아스팔트 길을 걸어 가야해서 무척 더웠다. 18.5km를 7시간만에 걸었다. 오늘도 정말 대단했던 하루다. 이제 빨리 늦은 점심을 먹어야한다. 지난 번에 맛있게 먹었던 성당 앞 가게가 생각나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아나의 산타 마리아 성당>

 순례 첫날 보르다에서 만난 미국 할머니 두 분은 오늘 이곳에서 멈춘다고 했다. 비아나도 꽤 많은 순례객들이 머무르는 마을이다. 예전에 나도 다시 온다면 이곳에서 하루 머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정을 짜면서 로그로뇨의 양송이 타파스를 꼭 부모님께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이번에도 이곳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식당에서 번역기를 사용해서 주문을 했지만 나오는 음식이 주문과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친절하게 택시까지 불러주시고 공사로 인해 택시가 이곳까지 들어오지 못하자 택시가 오는 곳까지 우리를 데려다주셨다. 정말이지 친절한 주인 아저씨였다. 혹시나 다음에 또 온다면 이곳에서 밥을 먹고 비아나에서 하루 쉬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역시 택시를 타니 금세 도착했다. 순례길에서 택시는 미터기를 찍지 않고 처음부터 얼마다라고 정해놓고 탔다. 사실 택시가 아닌 승합차가 온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루르드에서를 제외하고는 미터기를 찍은 걸 본 적이 없다. 오늘은 25유로였다. 사실 택시 요금이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니 비싼 지 아닌 지를 모른다. 만약 비싸게 탄거라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해야지. 


 로그로뇨는 도시답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인파들로 성당 앞 광장은 가득했다. 무슨 축제를 하는 듯했는데 귀여운 아이들이 장기자랑을 하는 것 같았다. 

<로그로뇨의 산타 마리아 데 라 레돈다 성당>

 시끌벅적한 광장과는 다르게 성당 내부는 조용했다. 벽 하나를 두고 이렇게나 상반된 모습이라니 신기했다. 초를 봉헌하고 기도를 했다. 지난 번 이곳에서 새로 산 운동화 이야기를 하며 타파스 골목을 찾아갔다. 골목 골목마다 유럽 분위기가 물씬 풍겨 아빠는 사진 찍기에 바빴다.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

 양송이 타파스 집은 아직 영업 전이었다. 잠시 앞에서 이곳에 왜 유명한지 얼마나 맛있는 지 얘기를 하며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잊지못 할 그 맛, 양송이 타파스>

 문을 열자마자 들어가서 달콤한 화이트 와인 석 잔과 양송이 타파스 3개를 시켰다. 그리고 처음으로 엄마와도 짠!!

 엄마는 역시 주부답게 어떻게 굽는 지 곁눈질을 했다. 굽고 올리브오일 뿌리고 소금을 쳐서 주는 게 다인데 어쩜 이리도 맛있는지, 달콤하고 시원한 화이트 와인과 아주 잘 어울렸다. 부모님과 최고의 조합이라며 좋아하셨다. 역시 맛집은 소개해주고 반응이 좋으면 아주 뿌듯하다. 

 일식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로그로뇨에서는 중국요리를 파는 웍이라는 곳도 있는데 부모님과 먹기에는 조금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중식은 소화도 잘 안되고... 검색 끝에 찾은 일식집은 밥이 조금 질었고 간장도 초밥도 조금 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엄마는 특히 미소된장국을 준 것을 좋아하셨다.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니 어느 정도 루틴도 생겼다. 우리 모두 이 길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무언가 차분히 기록하고 길을 걸으며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기엔 심리적인 여유가 없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오히려 더 바빠서 그런가? 다음 날 동키를 예약하고 식사할 곳을 찾아보고 빨래도 하고. 그나마 빨래를 하며 보내는 시간이 고요히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조금 더 상냥하게 부모님을 대하자고 마음 먹으면서도 늘 부루퉁대는 느낌이다. 어릴 때부터 살가운 딸은 아니였으니. 그래도 이 길에서만큼은 나를 더 의지하셔야 하는 부모님에게 살갑게 대하자. 그리고 욕심내지 말고 지금처럼 천천히, 다치지 않게 여유있게 걸어보자.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숙소 정보: HOTEL SERCOTEL PORTALES

 로그로뇨 구시가지를 빠져나가는 쯤에 있다. 걸어왔다면 로그로뇨를 관통해야 만날 수 있었던 숙소. 꽤 조용하고 룸 컨디션도 괜찮았다. 호텔답게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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