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부터 발레까지 여기에 다 있다.
여행의 목적지를 정할 때 이미 가야겠다 하는 이유를 정해 두었더라면, 그러니까 그곳의 잘 알려진 장소들, 그곳에서 봐야 하는 것들, 거기서 먹어야 하는 것들, 그곳에서 해야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이미 알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여야만 한다고 정했다면 덜 놀라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파리에 가면 에펠탑엘 갈 거고,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을 보거나 바티칸에 간다거나, 터키에 가면 블루모스크나 아야 소피아가 있고 그런 것들.
하지만 일단 장소를 정해두고(내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들 중 안 가본 곳)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찾아냈더니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고른 것은 하늘이 내게 주신 행운이었다. "그래, 너 여행 그만큼 열심히 했으니 이렇게 얻어걸리는 것도 있어라"하고 내려주는 행운. 2018년 8월, 엄마와 함께하는 일주일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은 날씨부터 장소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어린 시절 받았던 종합 과자 선물세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열어보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여행 종합 선물세트 같은 상트페테부르크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살짝 보여주려고 한다.
눈부신 날들의 아름다운 장소들. 궁전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않지만, 하늘색, 에메랄드색, 심지어 핑크색의 궁전 건물들을 보면서 놀란 것을 보면 분명 컬러풀한 이미지는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디즈니 만화에도 지붕 정도에만 색이 화려하지 않았던가? (뜬금없이 생각난 호그와트 마법학교도 알록달록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들은 파스텔톤이었다. 그런데 아름다웠다. 촌스럽지 않았고 우아했으며, 신선했다. 그리고 그 내부는 세계의 어느 궁전에도 뒤지지 않겠다고 작심한 듯 화려하거나, 중후하거나, 고풍스럽거나, 센스 있었다. 심지어 방 하나가 보석"호박"으로 가득 발라진, "호박방"을 여행 첫날 보게 되었으니, 황제가 다스리던 러시아라는 나라를 여행하면 과연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미 첫날의 여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합격이었다.
그리고 여행의 마무리에 찾아간 여름궁전은, 정원 가득 금빛 찬란한 동상이 둘러싼 분수로 우리를 반겼다. 내부는 또 어떠한가. 벽지 하나, 벽난로 하나, 바닥장식, 벽장식, 액자, 그 무엇 하나도 "적당한"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최고이고 싶어 했고, 그렇게 꾸며놓으니 나중엔 어느 정도의 아름다움과 대단함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영국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이라고 하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박물관에서 하루를 오롯이 다 쓰며 즐길 수 있었던 건 최근에 생긴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덕분이었다. 교과서에서 보던 작품들이 심심치 않게 있어 놀랐는데, 1분에 1 작품만 봐도 5년이(더러는 3년이? 누구 말이 진실일까) 걸린다더라 했다. 눈 만돌리면 피카소에 고흐 고갱,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있는 이 곳은 신관, 구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하루 일정을 알차게 짜야 그래도 중요한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내부 지도에도 유명 작품들이 어디에 있는지 나와있는 걸 보면, "최소한 이 정도는 빼먹지 말고 보고가"하는 배려가 있는 것 같았다.
박물관은 훌륭했다. 한국의 박물관들처럼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요건 더 안되고 이런 규제보다는, 그저 지킬 것은 지키되 편안하게 자유롭게 감상하게 하는 유럽의 미술관, 박물관들의 그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수많은 국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과 그들을 설명하는 가이드들이 뒤엉켜지는 유명 작품 안에서는, 휩쓸려 지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만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고 싶어 했고, 와보니 왜 그렇게 모여드는지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집념이 모아드린 예술작품은 실로 엄청났다.
유럽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성당 여행. 고풍스러움과, 성스러운 권위가 느껴지는 웅장한 외관의 성당은 모든 유럽 투어에서 한 번쯤은 꼭 포함하게 된다. 러시아의 국교인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들은 서방의 로마 카톨릭과는 또 그 느낌이 매우 다르기에 이번 여행에서 만난 성당들이 엄마한테는 또 신선함이었을 것이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성 이삭 성당은 야경도 멋있었는데 해 질 녘 그맘때의 풍경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우리 뭐하다가 놓쳤지?) 엄청난 기둥이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카잔 성당은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씨에 잠시나마의 쉼터가 되어 주었다. 성화에 이마를 대고, 키스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각자의 믿음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 다름을 생각했다.
러시아의 성당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테트리스 성당으로 불리는 두 곳이 아닐까 싶다. 모스크바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피의 구원 사원. 나는 두 곳을 모두 다녀왔는데, 외관이 좀 더 테트리스에 가깝고 아기자기한 것은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성당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내부의 아름다움과 대단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의 구원 사원에 백전백승을 안겨주고 싶다.
"성당 안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 얼른 둘러보고 가자"라고 생각했던 엄마와 나에게 "세상이 그렇게 뻔하지 않음"을 증명해낸 이 곳은, 내부의 모든 벽과 기둥이 아주 작은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성화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까 벽에 액자를 거는 수준이 아니라, 일부가 장식된 것이 아니라 모든 내부의 표면이 모자이크 성화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어느 여행지를 가도 "야경"은 좀 더 오랜 기억 속에 남는다. 그래서 늘 어느 언덕에 오르거나, 어디 전망대에 들르거나, 혹은 어느 야경 유람선을 타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여행 추억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곳이 바로 부다페스트의 야경이다. 특히 엄마에게 첫 유럽여행이었던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강렬한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야간 크루즈(보트?)를 탄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부다페스트를 이겼다. 적어도 엄마의 마음속에서는. 강을 따라 지어진 모든 건물들이 해가 지고 난 뒤 빛나기 시작했다. 강폭은 넓었고, 배는 이 도시의 아름답게 빛나는 모든 건물을 보여 주겠다는 듯이 달렸다. 강바람이 찼지만 어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배가 한참을 달리며 우리를 인도한 끝에는 이 보트 투어의 하이라이트, 아름다운 조명이 빛나는 "다리"가 있었고, 이 다리는 시간이 되자 음악과 함께 들어 올려졌다.
여행의 목적지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정한 순간, 내가 제일 먼저 찾은 건 "발레"공연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마린스키"극장에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경쟁하는 세계 최정상급 오페라 발레극장이라는 "마린스키 극장"을 미리 알고 있었냐고? 몰랐다. 그런데 여행지를 고르고 러시아=발레라고 생각해서 찾아봤더니 이토록 아름다운 극장이 있다고 했다. 공연을 보지 않아도 그저 극장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에서, 발레 공연을 볼 수 있는 곳. 여기가 바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내가 유일하게 미리 예약한 것이 이 발레 공연이었다. 마침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고 있었는데, 적당한 가격과 좋은 좌석을 위해 열심히 후기를 찾았고, 영어가 지원되지 않는 티켓 예매 홈페이지에서 구글 번역기와 함께 표를 샀다. 그리고 공연 날 밤, 엄마와 나는 난생처음 "발레"라는 장르를 극장에서 풀 버전으로 보았고, 또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배우들의 표정까지 다 보이는 자리는 2층 사이드였고, 대사가 하나도 없는 공연에서 모든 상황을 몸으로 이해시키는 배우들의 몸은 잔근육 하나하나까지 아름다웠다.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고 정지한 그들의 몸동작에서 그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쏟았을 시간이 느껴졌고, 가뿐하게 뛰어올랐다가 타탁 착지하는 소리와 군무를 출 때 다다다다 작게 들리는 발소리마저 극 중에 녹아들었다. 훌륭한 무대, 의상, 오케스트라... 모든 것이 완벽한 밤이었고, 심지어 그 결말이 여러 개라는 백조의 호수는 그날 밤 해피엔딩을 선물해 주었다.
러시아에 가면 기념품으로 하나씩 사들고 오는 마트료시카 인형. 한 겹을 열면 또 다른 인형이 나오고, 또 열면 또 인형이 나오고, 또 열면 또 인형이 나오는 그 인형 "마트료시카"를 직접 그리는 체험 프로그램이 있었다. 여행에 가서 "그리기" 혹은 "만들기"를 해 본 적이 없는데 여행을 하는 새로운 즐거움을 찾은 기분이다. 초등학교 때 방학 숙제로 엄마의 도움을 받았던 이래로, "그리기"나 "만들기" 류의 미술 장르를 엄마와 함께 한 적이 없었던 듯한데, 대략 20년 만에 엄마와 함께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은 친절했고, 엄마는 진지했다. 영어가 되지 않더라도 직접 보여주면서 수업을 했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었고, 다 만들어진 마트료시카 인형은 돈을 주고 사 오는 어떤 기념품보다 의미 있고 소중했다. 서로 그림을 보면서 키득키득거리고, 어떤 색을 칠할지 고민하고, 어떤 장식을 해야 이쁠지 떠들다 보니 손바닥보다 작은 인형 하나를 칠하고 말리는데 4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호텔에 머물거나(조식과 야식은 라운지에서 해결)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다 보니(오랜만에 만났으니 엄마 밥이 최고) 식당에서 밥 먹을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외식이 필요한 순간 늘 고민해서 맛있는 집을 골랐다. 그러니까 맛있는 집이 많아서 "고민"이 필요했다. 스테이크가 맛있는 집, 조지아 음식이 조지아보다 맛있는 집(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조지아 음식점이 굉장히 많다)... 매 순간 즐기는 맥주도 맛있었고, 물가 차이에서 느껴지는 풍요는 덤이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도넛도 먹어야 했고, 러시아에만 있는 패스트푸드점이라는 쩨레목?(Tepemok)도 가야 했고, 끼니는 한정되어 있었고 먹을 것은 넘쳐났다.
먹으면서 행복했고, 행복했으니 이번 여행도 성공이다.
아마 내 생에 적어도 한 번은 더 이 종합 선물 같은 상트페테부르크에 가게 될 듯하다. 여행지를 고르지 못해 고민이라면, 다가오는 봄과 여름 나는 기꺼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권한다. 아주 자신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