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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성장 Mar 20. 2023

상처를 상처로 되갚는 일

남편과 함께 마트에 갔다

남편과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배달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자주 마트에 가지는 않지만, 필요한 물건을 보고 사야 할 것이 있어 가자고 부탁했다. 마트 입구에 가전제품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에 세 번씩 빨래를 돌린다. 겨울철, 빨래를 빨리 말리려고 늘 거실에 건조대를 펼친다. 가뜩이나 좁은 거실에 빨래가 가득한 건조대가 펼쳐져 있으면 답답해서 숨이 안 쉬어질 지경이다. 빨래는 하루 만에 마르지 않는다. 이틀이고 삼일이고 마를 때까지 내내 둔다. 삼일이 지나고 빨래가 마르면 다시 빨래를 하니, 거의 매일 거실의 주인은 건조대가 되어버린다. 그뿐이 아니다. 빨래에 묻어 나오는 먼지. 분명 빨래를 돌렸는데 실 같은 먼지들이 묻어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방법을 찾아보기도 하고 찐득이도 사보았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건조기가 출시된 이후 사고 싶다고 너무도 간절히 바랐었다. 

가전제품 코너를 지나면서 보니 할인한다고 안내판이 붙어있다. 진열상품 판매 제품은 더 할인이 된단다. 남편이 평소 반대했었기에  마트에 겸사겸사 데리고 간 것이다. 사실 무이자 할부로 사려고 카드 한도를 맘껏 올려놓고 갔다. 나의 목표는 건조기가 맞다. 

건조기를 둘 곳도 없는데 어디다 둘 거야?

우리 집은 전기도 자주 떨어지는데 어쩌려고 그래?

판매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핀잔을 주었다. 

응! 내가 이고 지고 살게!

내 카드가 무이자 할부가 되지 않아 결국, 남편의 카드를 빌려 결재를 했다. 남편은 절대 빨래를 돕지 않는다. 돌리는 건 내가 할 테니 널어놓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가  '본인 빨래는 버리라'라는 대답만 들었다. 빨래뿐 아니라 집안일 자체를 아예 돕지 않는다. 밥상을 차려놓으면 밥을 먹자마자 '다 먹었으니 치워!'이다. 본인이 빨래를 하지 않으니 빨래가 얼마나 고된지 모르는 것이다. 건조기를 배달 신청을 하고 마음이 홀가분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적어도 빨래를 털어 건조대에 걸고 먼지를 떼는 일은 없어진 것이다. 신났다. 할부금은 매달 남편 통장으로 넣어줄 것이다. 

좋은 기분으로 장을 보았다. 엄마가 도통 식사를 못해서 간식거리와 국거리와 과일 등을 사고 내가 먹고 싶은 맥주와 과자를 이것저것 골라 담았다. 문제의 발단은 센베이 과자였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 하나, 내가 좋아하는 거 하나를 카트에 담았다. 남편이 가격표를 보고 한 개 만 원짜리 과자를 먹어야 하냐며 면박을 주기 시작했다. 두 번 정도 했을 때 이제 그만하겠지 했는데 계산하고 나오면서도 두 번을 더했다. 기분이 상했다. 

나도 돈 버는데 내가 과자 하나 못 사 먹어?

순간 울컥하는 감정과 함께 눈물이 났다. 치사하게 먹을 것 가지고 그러니, 내가 먹는 게 그렇게 아까운가? 먹는 것 보기 싫음 끝난 관계라 하던데. 이제 우리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도 천혜향을 먹으며 네 개에 만 원이라 좀 비싸다 하니 '그 비싼 걸 꼭 먹어야 하냐'라며 한마디 했었다.

남편은 나와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면서도 어른 행세를 한다. 아니 그 정도면 할아버지가 맞다. 그림자도 밟지 말라느니, 저 멀리 떨어져 걸어오라느니, 자기는 땅 나는 하늘이라며 '어디 감히'를 남발했다. 처음엔 농담이었을지 몰라도 반복해서 수백 번을 듣다 보니 더 이상 농담이 아니었다. 저 사람은 나를 저렇게 밖에 생각하지 않는구나 화가 났다.  

그렇게 돈 아까운 줄 아는 사람이 술 먹고 지갑 잃어버리고 다니고, 백만 원 넘게 돈 빌려주고 받지도 못했어? 

또, 당신 얼마 전에 사고 나서 이백 얼마 해 먹었잖아. 나한테 할 소리야?

지나간 일, 들추지 말자 다짐했건만! 

나는 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평소에도 엄청 짠돌이라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어리석다 생각해서 몇 날을 두고두고 속 쓰려했던 일들이었다. 가뜩이나 그 사고로 인해서 일을 그만두고 쉰 지 이제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자꾸만 당하기만 하다 보니, 나도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의기소침해 있던 남편이 더 기가 죽을까 그에 대한 다른 소리는 일절 안 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말하고 나서 심했나? 했지만 나도 할 말은 많다.

결혼 17년 차. 남편은 한 번도 결혼기념일을 챙긴 적도, 식구들의 생일을 챙긴 적도 없다. 본인 아버지가 그랬듯, 남편의 도리는 돈만 벌어다 주면 ''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다. 집안일도, 말투도, 나를 생각하는 마음도. 우리가 처음같이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와 지금의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아이를 출산하고 지방으로 출장 갔을 때, 한 달에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고 일 핑계를 대며 전화 한 통 없었다. 난 그때부터 이미 남편의 마음이 식은 줄 알았지만, 부정하기에 너무 자존심이 상해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 남편에게 '나를 사랑하냐?' 묻곤 한다. 그 속에는 '너는 왜 나를 배려하지 않니? 사랑하는 게 맞니?'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사람은 알 리가 없다. 아니,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 결혼생활 17년을 하고 무슨 사랑타령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랑은 고사하고 애정이라도 조금은 남아있어야, 흔히 말하는 '전우애'라도 있어야 하는데, 뭔가 마음이 휑하다.

내가 한마디 했다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찌그러져 있는 남편이 안쓰러운 걸 보면, 아마 나만 남편을 사랑하는 것 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상처를 상처로 갚아주는 일은 가장 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 내가 더 편치 않은 사람이다. 순간의 좋지 않은 감정을 터트 리엔 내 마음이 너무 약하다. 나를 위해서라도 상처를 주는 일은 자제해야겠다. 나는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퇴근 후 저녁엔, 먹고 싶다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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