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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성장 Aug 16. 2023

운명


앞자리 수가 2자였을 때는  아직 젊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3자로 바뀌는 해부터는 뭘 해도 어른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마음의 무거움이 함께 따라왔다. 나 때만 해도 골드미스라는 단어가 처음 나올 때인지라, 노처녀, 시집은 언제 가냐는 물음표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결혼에 대한 부담감은 빨리 해치워야 하는 숙제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주변 친구들은 남자친구도 있고 했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의 나이 차이가 44년이나 나기 때문에, 빨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듯하다. 엄마는 늘 '내가 죽기 전에 너 시집가는 것을 보고 죽어야 할 텐데...'라며 압박을 엄청 하셨기 때문이다. 남자도 소개해 주지 않으면서 시집가라는 소리는 참 잘도 하셨었다. 

20대 초반, 버스회사에 같이 다니던 언니가 펜팔을 했다. 어쩌다가 알게 된 군인 오빠였는데, 같이 일하는 언니에게 심심풀이로 소개해 주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고, 이메일을 주로 쓰던 시절이 아니었다. 소개해 주고 나니, 매일 편지를 주야장천 써대며 주고받고 하던 재미로 나는 뒷전으로 밀렸다.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언니에게 부탁해 나도 펜팔을 해보겠노라, 소개를 부탁했다. 그때 알게 된 분이 현재. 지금의 남편이다. 

입금원으로 일했던 시절, 쉬는 시간마다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면 시간이 잘 갔다. 또 받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고만 하다가, 언니가  군대에 면회를 간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한 번은 해양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그분을 만나러 갔었다. 처음에는 얼굴도 쳐다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왔다. 박스에 편지와 과자, 초콜릿 등을 넣어 선물로 주고 왔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먼발치에서 엄지손가락만 하게 보였던 한순간의 찰나였다. 그 이후, 삐삐번호를 서로 교환하고 음성을 듣고, 종종 전화도 하고 했다. 그러면서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연락이 한 달 두 달 끊겼다가 두절이 되었다. 점점 메일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편지 대신 메일로 간간이 안부를 묻고 지냈다. 일 년에 한번, 두 번. 연락이 끊길만하면 메일이 한두 번 왔었고, 나도 재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갔다. 

그러던 와중에, 엄마가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하루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발음이 어눌해지고 한쪽을 못 움직이셨다. 뇌졸중이었다. 

형제도 없고 의지할 곳 없는 내가 연락을 해볼 곳은 몇 군데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이 사람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힘들일 이 있을 때마다 생각이 났다.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나는 너무 겁이 났다. 엄마가 늘 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을 닥치고 나니 마음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컸었던 것일까?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이 사람이 나름 힘이 되었다. 그때부터 연락을 자주 하게 되었다. 

지방에 사는 그 사람은 오랜만에 일 때문에 서울에 오게 됐다고 했다. 그때를 놓치면, 또 언제 얼굴을 볼지 장담할 수 없었다. 여러 해를 편지와 전화, 메일 등으로 연락했는 던  그 사람과 만난 지 3.4시간 만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미 알고 지낸 지가 8.9년이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오래된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대화도 잘 통했다. 그렇게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하며, 연애 1년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펜팔을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운명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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