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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성장 Sep 06. 2021

나는 아픈 아이였다

나는 아픈 아이였다.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으나 3년도 안되어 다시 파양 되었다. 3세 때 지금의 부모님을 만났다. 가족이 아닌 동거인 2명. 이 사람들이 모두 가족으로 완성되지는 못하였지만 엄마의 호적에 내 이름이 올라가기까지는 약 15년의 기간이 걸렸다. 아이의 감정 완성은 5세까지 발달된다고 한다. 나는 그 시기를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며 집중하지 못했다. 왜인지 늘 허공에 붕 떠다니는 사람 같았다.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의지와 상관없이 휘청였다. 이 마음을 붙잡는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어쩌면 아직 붙잡지 못했을 수 있다. 한동안은 괜찮았다가 한동안은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회의감이 몰려왔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마음이 한순간에 고쳐질까?


65세 차이 나는 할아버지를 아빠라 하고 44세 차이 나는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자랐다. 동거인이었으나 18살 취업을 위해 필요한 호적이 없어 엄마의 호적에 올랐다. 2살 때 양부모에게 파양 되며 나의 호적이 사라졌던 것이었다. 아빠는 끝끝내 나를 자식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엄마의 성을 따라 성씨가 바뀌었다. 밥은 먹고 자랐으나 아빠에게 객식구인 나는 늘 눈칫밥 신세였다. 늘 미움받았다. 엄마를 식모로 두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객식구였다. 엄마의 덕에 먹고 자라고 살았지만 풍족하지 못했고 사랑이라는 것은 받지 못했다. 늘 나는 주워온 아이였으며 언제라도 버림받을 준비가 되어있던 아이였다.  


엄마는 6.25 전쟁과 일제강점기로 어려운 시절을 겪어 소학교도 나오지 못한 까막눈이었다. 나는 배움에 관하여는 늘 결핍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학교만 왔다 갔다 하고 누가 공부하라며 알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빠는 초등학교만 나와서 파출부로 돈 벌러 나가라며 중학교도 보내지 않으려 했다.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중학교도 돈을 내야만 학교를 갈 수 있었다. 돈이 많이 드는 나는 구두쇠인 아빠에겐 눈엣가시였다. 나를 위해 10원도 쓰지 않으면서 엄마가 하는 부업 일은 그렇게 싫어했다. 나는 미움받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얼굴 마주치며 객식구로 사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춘기가 되면서 그러한 생각들은 나를 지배했다. 밤마다 울었다. 나 같은 게 살아서 뭐 하나? 눈곱만큼의 희망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엄마에게 귀에 딱지 앉게 듣던 말이 있다. 하나는 고등학교는 여상에 가서 졸업하면 돈을 벌어와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결혼을 하면 엄마를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말대로 고등학교는 여상으로 진학하였다. 먹고사는 것이 힘들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식모살이를 온 것이고 나는 아빠에게 동거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돈을 버는 것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취업을 잘하려면 자격증도 따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했다. 3년 내내 시험 기간에 잠을 자본 적이 없다. 무조건 밤을 새웠다. 성적은 그런대로 잘 나왔다.

그러다 취업 준비를 위해 서류를 준비하던 중 내가 호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동사무소에는 주민등록번호가 살아있는데 호적만 사라졌다. 알고 보니 입양했던 집에서 나를 파양 하며 사라진 것이었다. 엄마는 없는 살림에 호적을 만든다며 빚을 내어 변호사를 샀다. 이후 나는 엄마의 성씨를 따라 이 씨에서 임 씨가 되었다. 이때까지도 내가 입양되었다 파양 된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꽤 충격이 컸다. 하지만 없는 살림에 큰돈을 빚지게 된 엄마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아무 내색하지 못했다. 나중에 돈 벌어서 꼭 갚아주겠다고 다짐만 했다.


취업 준비를 열심히 했다. 1차 서류전형 2차 필기시험은 늘 합격했다. 3차 면접시험에서 몇 번째 탈락을 했는지 모른다. 성적순으로 대기업 추천을 받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몇 번이고 나만 기회를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줄 낙방에 나는 취업을 포기했다. 작은 키에 뚱뚱한 외모. 더군다나 안면마비까지 생겨 자신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을 위해 말끔하게 포기했다. 한동안 아무 희망 없이 지냈다. 나 자신이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는지 비관하고 비하하며 지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취업하는데 나만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모양새가 부끄러웠다. 파출부 하는 엄마에게 돈을 벌어 주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스러웠다. 그러다 동네 버스에 붙은 버스회사 입금원 구직 광고를 보고 홀린 듯 버스회사로 향했다. 이일 저 일 따지지 말고 아무거나 돈을 벌어보자! 일단 부딪쳐봐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면접에 가서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다음 날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고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구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이후 무엇을 도전하는데 그렇게 큰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주어진 것에만 연연하지 말고 스스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생애 첫 월급 50만 원을 엄마에게 주었을 때 나는 너무 행복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나도 돈을 벌 수 있구나! 사람 구실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아픈 아이는 한 발자국씩 사회를 향해 걸어갔다. 주어진 길이 아닌 나만의 길로 조금씩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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