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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년 만에 찾은 아들

2013년 6월 1일

by 정재근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우리 집안은 잘 될 거라고. 아버지가 수백 년 만에 아들을 찾아드린 한양조씨 할머니가 잘 보살펴 주실 거라고. 이 글은 왜 아버지가 한양조씨 할머니의 음덕으로 우리가 무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한양조씨 성묘기념 수건.jpg


나는 하동정씨 문성공파 29세손이다. 문성공 정인지(鄭麟趾)는 하동정씨 시조 정도정(鄭道正)의 10세손이다. 문성공은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나는 큰아들 익위공 광조(光祖)의 후손이다. 그래서 누가 물으면 “저는 하동 정가 문성공파 29세손입니다. 문성공 정 인자 지자의 19세손입니다. 문성공의 장자 익위공파로서 익위공 정 광자 조자의 18세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2006년 병술년에 발간한 하동정씨 문성공파보에는 중요한 정정이 있었다. 문성공의 큰아들 익위공의 생모가 경주이씨에서 한양조씨로 정정된 것이다. 문성공의 부인은 한양조씨와 경주이씨 두 분인데, 5남 2녀의 자녀가 모두 경주이씨의 출생으로 기록되어 왔다. 그러나 2006년 병술보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정하고 그 의결 과정까지 소상히 기록하였다.


익위공 광조는 “익위공과 정경부인 경주이씨와의 출생 연도 확인 과정에서, 경주이씨, 한양조씨 양측 족보 내용을 확인 검토한바 한양조씨의 子로 확인되었으며, 2006년 9월 26일 문성공파 종중회장단과 족보발간위원등의 참석회의에서 정정하기로 결의하였음.”이라고 정정 내용과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하동정씨 문성공파보 제1권, 문성공 제일자 익위공 광조파, p.1)


이때 문성공파 종중회장은 참판공파 정기동이었고, 아버지 정승기(찬승)는 익위공파 회장으로서 2006년 병술보 족보편찬의 편집부위원장으로 참여하셨다.


문성공은 19세였던 1414년(태종 14년) 한양조씨와 결혼하였다. 한양조씨는 결혼한 지 22년이 되던 1435년(세종 17년)에 돌아가셨다. 족보에 한양조씨가 돌아가신 날(을묘 7월 5일)만 있고 태어나신 날은 없어 몇 세에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다. 문성공은 부인의 3년 상이 지난 후 1439년(세종 21년)에 경주이씨와 재혼하였다. 경주이씨는 생몰 연도가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데 1417년(정유년)에 태어나시고 1486년(병오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경주이씨의 큰아들로 익위공 광조가 올려져 있었다.


당시 익위공파 종중회장이셨던 아버지는 족보를 면밀히 살피던 중 경주이씨의 출생년인 정유년이 1417년이고, 익위공의 출생년인 병신년은 1416년이라는 것을 발견하셨다.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어머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들은 이미 세상에 출생한 것이다.


아버지는 하동정씨 족보만을 보면 익위공이 경주이씨가 아니라 한양조씨의 소생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한양조씨가 익위공을 낳았다는 기록이 필요했다. 문성공파 종중에 이 문제를 제기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족보출판사인 회상사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이를 입증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여식이라도 명문가에 출가하여 사위가 높은 벼슬을 하면 사위도 족보에 올릴 수 있으니, 한양조씨 할머니의 남편이 영의정 문성공 정인지라면 그를 사위로 맞은 한양조씨나 경주이씨 족보에 출가녀의 혼인과 자녀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결국 한양조씨 족보에서 한양조씨 할머니가 하동정씨 문성공 정인지와 혼인하여 아들 광조를 낳았다는 기록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요청으로 문중의 확인 절차를 거쳐 2016년 병술보는 익위공의 생모는 경주이씨가 아닌 한양조씨로 정정하고, 그 경위까지 기술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동정씨 대동보가 발간된 1800년 이후 206년 만의 일이고, 한양조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1435년으로부터 571년째 되는 해이다.


한양조씨 할머니의 묘소는 남양주시 진건읍 진건면 앵도동에 있고 경주이씨 할머니는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문성공 묘소 뒤 10여보에 위치하고 있다. 그동안 자손들은 문성공과 함께 모셔진 경주이씨 할머니의 괴산 묘역을 참배할 기회는 많았으나, 공의 묘와 멀리 떨어져 있고 더욱이 생모도 아닌 한양조씨 할머니의 묘를 자주 둘러보지는 않았다.


2013년 6월 1일, 남양주시에 있는 한양조씨 할머니 묘소에 익위공파 뿐 아니라 문성공파 여러 지파 종중 대표가 모여 성묘하고 익위공의 생모가 한양조씨 할머니라는 사실을 문중에 널리 알리는 행사를 가졌다. 당시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실장이던 나도 두 아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성묘 후 아버지는 우리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애비야, 우리 집안 잘 될 거다. 애비도 잘 되고, 우리 손자들도 한양조씨 할머니가 잘 보살펴 주실거다. 내가 570년 만에 잃어버렸던 당신 아들 찾아드렸으니 할머니가 내 자식들도 잘 살펴 주실거다.”


생각해 보라. 배 아파 낳은 아들이 엄연히 있는데도 수백 년간 다른 사람 소생으로 빼앗긴 채 직계 자손들 제삿밥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설움을. 한양조씨 할머니는 수백 년 만에 아들을 품에 안게 해준 아버지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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