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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피 Feb 10. 2023

5. 조각난 기억, 추억을 만들자.

인생이 유화 같으면 좋겠다.



기차 타고 지방으로 출장을 가던 어느 여름날 정차한 중간 에서 '아 이렇게 해를 잔뜩 받아 빛나던 녹색의 푸르름을 만끽하던 여행이 있었지.' 하고 문득 저 밑에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와 일본 여행을 간 때를 상기시킨 건데 대체 언제 갔던 일인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 휴대폰 사진을 뒤지고, 일기를 뒤져봤지만 2015년부터 쓰던  여행 계획이나 기록 한 줄이 없었다. 결국엔 집에서 노트북과 외장하드를 꺼내어 확인해보니 고작 4년 전의 가까운 과거의 일이었다.


친구들과 예전 일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기억이 맞추지 못한퍼즐처럼 조각나서 군데군데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경제적으로 무너졌던 IMF시절 이후의 몇 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그때의 일을 기억 잘 못한다. 엄마는 그 힘겨웠던 생존의 시간을 지나고 난 후에는 아들 딸의 사춘기가 하나도 없었다고 거저 키웠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우리 남매가 순하게 큰 것은 맞지만 사춘기가 없지는 않았다. 그 시절의 유행가가 티비에서 흘러나와도 엄마의 기억에는 전혀 없다. 그걸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되다니.




인생이 유화 같았으면 좋겠다.
망친 그림 위에 덧칠하고 덧칠하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인간은 잊고 싶은 기억을 알아서 잊어버린다던데 도저히 잊히지 않는 기억만 남았고, 오히려 소소한 일상의 추억 오래 방치된 사진처럼 빛이 바래 사라졌다. 오빠의 자랑이었던 귀여웠던 돌 사진이 엄청 잘보이는 공간에 있었음에도 별 잡동사니를 그 앞에 쌓아놔 종내엔 사진에 습기가 묻어 번져 망가진 것을 아주 오래동안 몰랐던 것처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힘겨워하는 동안 무뎌지는 삶을 원하고 또 노력했다. 쉽게 뜨거워지지 않고 쉽게 고갈하지 않기 위해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간을 지나 그저 혼자 시간 잠잠히 흘러가기를 바랐는데 어느 순간 멈추 보니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아 이제는 이런 게 내 보통의 삶이 되었구나.' 성인이 되어 절반 이상의 시간을 이렇게 지나왔더니 나눌 추억이 학생 시절 이외는 없었다.

내 곁에 남아준 내가 좋아하고 편안한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릴 때조차 아픈 장면 속에서의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얼굴들이 떠올라 서글퍼졌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던 게 언제였을까. 우가 함께 즐거웠던 때를 이야기하려면 너무 먼 과거로 가야 하는구나. 언제부턴가 웃지 않게 되었구나.


그동안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의미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지만 웃지 못해서, 그래서 우리가 서로 편안해도 행복하지는 않았구나.

즐거운 기억들로 채워 넣는대도 아픈 기억은 잊을 수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할 때는 서로 바라보며 웃는 장면을 떠올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추억을 새롭게 쌓아보기로 했다.
즐거웠던 걸 되새김질 하려고 기록을 시작했다.


여행도 기억하지 못하는 머릿속에 뭘 넣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여행과 같은 삶의 이벤트를 글 한 줄로도 적어놓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게 제일 큰 문제인 것 같았다. 분명히 그 여행을 즐겼던 거 같은데, 무엇이 날 행복하게 했는지,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기록하지 않는 우를 범했다. 일기를 해우소 역할로만 감정을 내뱉기에 급급해서 즐거운 때는 적어놓지를 않다니 어리석게 짝이 없다. 과거에 대한 복기를 하려거든 행복한 일을 되씹어야 하는데 소화도 못 시킬 일들만 되짚고 있었다니 말이다. 




어느 여름 날 출근 길의 파란 하늘. 하늘을 넓게 볼 수 있는 건 서울 밖 생활의 유일한 장점이지만 계절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즐거움이 꽤 크다.


좋은 날 하늘을 찍는 걸로 시작하고 있다. 그저 업무 사진으로만 가득 찬 핸드폰 앨범을 내 일상으로 채워나가려고 한다. 소소하지만 감사한 일상들을 기록하고 때때로 그것을 떠올리는 일 그것도 추억을 만드는 거 아닐까.


친구들을 만나면 힘들었던 일을 나누는 것보다 즐거운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해 보자. 조금 더 많이 웃고, 그때를 사진으로 기억하는 일. 그렇게 즐거운 시간들을 담아보려 한다.

어느 날 비온 직후 10여분간 떠있던 쌍무지개, 이날은 퇴근도 하지 않고 회사 앞 화단에 앉아서 멍하니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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