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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상인 Dec 16. 2021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그리스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 그대로 풀어 보면 풀을 묶어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다. 역시나 한자만 보면 이 무슨 말인가 싶다. 이 사자성어도 지난 새옹지마(塞翁之馬)처럼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오랜 옛날 중국에 위무자라는 왕이 살았다. 당시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함께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젊은 부인과 함께 순장하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는지. 위중한 상태에 위무자는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부인을 재가시켜달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임종 직전에 말을 바꾸어 함께 순장해달라며 눈을 감았다. 위무자의 아들 위과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결국 아버지의 정신이 온전하실 때의 유언을 받아들여 부인을 재가시켜주었다. 나중에 옆 나라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 장군과 혈투를 벌이려는 찰나 적들이 우수수 낙마하는 게 아닌가? 크게 한 판하 지도 않고 손쉽게 적장을 잡은 위과였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길, "내가 재가시킨 여인의 아버지다. 내 어찌 은혜를 갚을까 하다 풀을 묶어 은혜를 갚았다. 이제 눈을 제대로 감을 수 있겠구나. 고맙다" 하며 사라졌다. 이 고사를 통해 죽어서도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로 결초보은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고대 로마사에서도 이런 결초보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고사가 있다.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칸나에 전투를 통해 약 8천 명의 포로를 잡아드린 한니발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원정을 나온 한니발이 아무리 전쟁을 잘한다고 해도 포로 8천 명의 식사를 대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고로 한니발이 꾀를 내어 로마 원로원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8천 명의 포로를 송환하는 대신 돈을 달라 했다. 한니발 입장에서는 객식구도 줄이고 돈도 얻는 1석 2조의 묘책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이를 거절한다. 로마인은 패배에 대해서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강인한 민족이라는 이유였다. 한니발은 이 제안이 먹히지 않자. 이 8천 명의 포로를 그리스에 노예로 팔아버렸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말했듯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리스에 자치권을 부여한 로마의 관대함에 그리스도 무언가 해야겠다고 느꼈다. 이때 그리스 전국을 뒤져 그리스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전직 로마 포로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났기도 지났으며, 또 현대와 같이 장부 개념이 똑 부러지던 시대가 아니다. 약 기원전 200년의 일다. 그럼에도 그리스는 1,800명의 포로를 찾아내어 로마로 송환했다. 어찌 보면 그냥 보낸 거 같지만.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의 물건을 빼앗아서 원주인에게 돌려주겠다.라는 건 당시에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그리스는 로마에게 진 빚을 갚았다.


언제나 인생을 돌아보면 뜻하지 않은 횡재를 만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인데, 상대는 큰 감사를 느껴 결초보은의 마음으로 나에게 보다 큰 답례를 해줄 때가 바로 그럴 때이다. 그런데 가끔씩 보면 그런 결초보은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렵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지금 위선자를 논하고 있다. 로마는 그저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에게 자치권을 넘겨주면 그리스는 우리 로마인 노예들을 송환시켜 주겠지?' 하는 계산적인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 주변엔, '내가 이런 거 저런 거를 해줬으니. 이만큼을 돌려받아야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볼 수 있다. 물론 이 마음을 드러내어 '왜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왜 이렇게 안 해?'라고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이러저러 상황과 정황을 들어 돌려 돌려 이야기한다. 당연히 돌려 말하면 이해를 못 한다. 그럼 답답했는지. '왜 넌 내게 이렇게 안 해줘?'라며 서운한 말을 툭 하고 내던진다.


언제나 인간관계를 돌아보면 이렇게 내가 해준 것보다 받는 게 없을 때 서운함을 잘 느낀다. 비단 지인 관계를 넘어서 가족 사이도 그렇다. '엄마가 이렇게 해줬으면, 네가 이 정도는 해줘야지!', '엄마 내가 시험 100점 맞아 왔는데, 엄마도 나에게 이것 정도는 해줘야지'하며 실랑이가 벌어진다. 사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결초보은 이전에 '호의를 베풂'이 먼저다. 또 호의라는 건, '내가 여유로운 와중에 돕는 일'이다. 즉, 애초에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내게 필요 없다고 해서 누군가에게도 필요 없는 게 아닐 수 있기에 '여유로움 속에서 나누는 일'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례는 그보다 더욱 귀중한 것일 수도 반대로 답례는커녕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돌아오는 답례마저도 답례자가 여유로운 와중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선행, 베풂, 나눔의 미학은 '답례'를 생각하지 않고 행했을 때, 가장 값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칸트는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실천은 불순하다.'라고 이야기했다. 가령 한강에 아리따운 여성(독자가 여성이라면 멋진 남성)이 빠져있다. 내가 저 여인을 구하는 목적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건 순수한 의도이지만, '저 이성과 불타는 사랑을 할 수 있겠지?' '아 저 이성이 나를 억만장자로 만들어 주겠지?' 하는 의도로 실천하면 불순하다는 이야기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서 누군가로부터 '서운함'을 느끼고 있다면, 내가 준 것만을 계산하고 있지 않은지? 또 내가 준 것만큼 꼭 돌려받아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지는 않는지? 내가 관계에서 무언가를 줄 때, 불순한 계산이 있었는지 돌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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