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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디오스 Feb 06. 2024

요약의 시대

누군가 내 인생을 요약해 버린다면...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읽을거리, 볼거리를 요약해 주는 시대가 되었다.

요약하면 예전에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명작문고판이다.

두꺼운 명작이나 고전을 줄거리만 짧게 요약해 주는 것이다.

수험생을 위한 축약판 고전 읽기. 이런 류의 제목을 단 책도 많은 것 같다.


요즘은 영화 리뷰 영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일보다 친절한 리뷰 영상을 더 찾게 된다.


그러다 언제부터는 신문에서도 헤드라인 외에 전체 내용을 몇 줄로 요약해 주기 시작했다.

재작년까지 계속 신문을 구독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한 면을 차지하는 긴 글을 다 읽지 않고 요약본만 읽고 본문을 읽지 않고 넘어가는 나 자신을 봤다. 마치 내용을 다 아는 것처럼, 이해한 것처럼, 읽은 것처럼 말이다.

깜짝 놀랐다.


내가 요약에 익숙해있구나...



요즘은 기술이 발달하여 AI는 더 많은 것들을 요약해 준다.

AI는 책 재목도 요약해주고, PDF도 요약해 주고, 내가 지금 열어놓은 웹페이지 내용도 요약해 주고, 영상내용도 요약해 준다, 얼마 전 카카오톡에서는 대화내용을 요약해 주는 서비스를 업데이트했다.

굳이 예전처럼 시간을 들여서 다 읽고, 다 보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아낀 시간들로 뭘 하는지는 이번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누군가 내 인생을 요약한다면 출생, 학창 시절, 직장생활, 취업, 퇴사 등 몇 가지 굵직한 일들로 요약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내 인생은 저런 굵직한 사건이 아닌, 일상을 아무 일 없이 살아내고 버텨 낸 시간들이 만들어준 것 아닐까? 지면이 모자라서 미처 싣지 못한 그 자잘한 순간들 말이다.


누군가 저렇게 굵직한 사안들로만 내 인생을 요약하면 좀 억울할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엔 큰 일도 아니고 아무 알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들, 하지만 내 마음을 울렸던,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감정이 요동친 시간들은 기록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제2의 사춘기에 가곡을 배웠다. 처음 향상발표회 때 부른 곡이나 순간들, 말수가 적은 남편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순간, 제이슨 므라즈를 알고 오디오를 사고 새벽까지 듣던 순간...

너무 많다.

이런 건 내 인생 문고판엔 들어갈 수 없겠지만 어떤 굵직한 순간 둘보다 내 인생을 값지게 만든 일들이다.

굵직한 사건들의 틈새를 메꿔준 저런 순간들과 사건들이 진짜 내 인생의 요약판에 들어가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


내 인생을 요약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내 인생을 함부로 요약하도록 두면 안될 것 같다,

내 인생의 요약할 순간이 온다면 내가 직접 해야겠다.




요약에 익숙해진 나 자신의 봤을 때의 그 충격을 되새기며 읽을거리든 볼거리든 모든 콘텐츠는 가급적 누군가 요약하지 않은 원문을 보도록 조금의 애를 써야겠다.


[P.S]


하지만 이 글에서도, 나는 이 글을 읽는 분이 직접 요약할 권리를 빼앗고, 볼드체색상으로 요약의 횡포를 부리고 말았다. 브런치 글을 쓰면서 언젠가부터 빠지게 된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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