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제주도 두 달 살이 숙소에 도착했다. 집 사진을 여러 번 들여다보아서 그런지 이미 와본 적 있는 장소를 다시 찾은 기분이 든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방안에 놓여있던 디퓨저에서 숲 속 향을 풍겼다. 사진 그대로 아담하고 아늑한 집이었다.
감성 인테리어를 품은 집이다. 집안 곳곳 필요한 물건들이 잘 배치되어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가져온 짐이 너무 많다는 거다. 세 달을 편히 살아가기 위한 짐을 차 안 가득 싣고 왔다. 집안에 이 물건들을 다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막막했다. 수납공간이 많지는 않았던 것이다. 고민 끝에 당장 필요한 물건만 두고, 자주 사용하지 않을 물건들은 차 트렁크 안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부산에서의 경험이 있으니 필요한 물건을 빠짐없이 챙겨 왔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짐을 정리할 때서야 ‘멀티탭’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산에서도 멀티탭이 없어 새로 샀는데, 그걸 또 까먹었다. 가진 멀티탭 수가 점점 늘어난다. 우리에게는 전자제품이 많았다. 핸드폰 두 개, 아이패드 두 개, 블루투스 이어폰 두 개, LED마스크, 블루투스 스피커, 티포트, 진동 클렌저 등... 이걸 다 어디다 두고 충천해야 할지도 문제였다.
주방에 있는 식탁은 거실로 옮겨와서 책상처럼 쓰기로 했다. 식탁을 거실로 옮기면, 식탁 위에 있던 주방용품을 올려두거나, 조리할 만한 공간이 없어진다. 주방용품을 올려둘 선반이 필요했다. 행거가 있긴 했지만, 속옷, 양말과 같은 옷을 보관할 공간이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으려 했었는데, 남편은 벌써 메모장과 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정리를 위해 필요한 물건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멀티탭, 주방 수납 선반, 옷걸이 등등. 사야 할 목록을 적었다. 우리는 제주도에서는 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대형마트로 향했다. 무조건 가장 싼 것이어야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감성이다. 저렴해도 집에 어울리지 않는 것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정리를 위한 물품과 당장 먹을 것을 사고 나니 20만 원을 훌쩍 넘었다.
짐을 정리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집안 가득 너저분했던 짐을 정리하니, 오랜만에 새 집으로 이사 온 것 같다. 깔끔한 나무벤치는 우리의 충전 스테이션이 되었다. 벤치 위에 가져온 책과 전자제품을 잔뜩 올려두었다.
돌담이 보이는 큰 갤러리 창 앞으로 식탁을 옮겼다. 창에는 나무로 만든 선반이 있었다. 선반 위에는 스피커와 달력을 올려두었다. 짐을 가져왔던 박스 하나는 비워서 속옷과 양말을 정리하고, 행거에는 당장 필요한 최소한의 옷만 걸었다. 현관 앞에는 운동복과 가방 그리고 모자를 걸어둘 작은 옷걸이를 두었다. 주방을 향해 나있는 창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것이었다. 주방에는 두 칸 선반을 사서 주방 용품과 마트에서 산 식료품을 정리했다. 깔끔한 집을 너저분하게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정리한다고는 했지만 처음 그대로의 감성은 아니다.
테이블을 갤러리 창 앞으로 둔 것은 만족스러웠다. 낮에는 블라인드를 올려둔다. 창 밖으로 돌담과 마당이 보였다. 우리는 테이블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다.
아침에 일어나면 블라인드부터 올리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선반에 올려둔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이곳에서 우리는 식사도 하고, 글도 썼다. TV가 없는 집이다. TV 대신 음악을 틀고 이 테이블에 앉아 평소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루 이틀 생활해보니 필요한 것들이 또 생각났다. 이번에는 다이소로 향했다. 역시 다이소가 싸고 좋다며 이것저것 생각나는 물건을 마구 집어 들었다.
“물컵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골라봐.”
난 신중하게 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천 원짜리도 많은데, 역시 마누라는 제일 비싼 걸 고르네.”
내가 고른 컵은 이천 원 짜리였다.
물컵, 주방용 수건, 실리콘 컵 뚜껑.... 잔뜩 샀는데도 16,000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가격이다. 남편은 이제 필요한 물건은 다이소에서 사자고 했다. 이 만큼이나 샀는데.. 더 살게 없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한 쇼핑에 남편은 신난 듯 보였다.
익숙하지 않고, 아담한 주방이라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만들어 먹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아담한 주방에 최적화된 간단한 음식을 해 먹었다. 아침은 아메리칸 브랙퍼스트 스타일이다. 토스트와 삶은 계란, 베이컨, 해시브라운, 과일로 한 끼 식사를 꾸렸다. 간단하지만 알차다. 저녁으로는 마트에서 산 반찬 세 가지와, 국을 끓여 먹었다. 메인 반찬은 스팸이나 비엔나소시지다. 가끔은 동네 식당을 간다. 이 곳에서 먹은 베트남 쌀국수는 서울에서 먹은 그 어떤 쌀국수 보다도 맛있었다.
집이 작아 최소한의 생활을 하고 있다. 냉장고도 더 이상 채워두지 않는다. 당장 먹을 만큼의 음식만 사두었다. 옷도 상의 세 가지, 하의 세 가지를 돌려 입으면 충분했다. 신발도 러닝화 하나와 운동화 그리고 슬리퍼가 전부다. 더 많은 물건, 더 큰 집이 아니어도 충분했다. 낯선 곳에서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은퇴 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아보자고 했었다. 지금처럼 차에 싣고 다닐 정도의 최소한의 짐만 있으면 어디든 살 수 있을 것 같다.